연애결혼은 여성 탓? 조선시대 '황당한' 어전회의

김종성 2023. 11. 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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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혼례대첩>

[김종성 기자]

지난달 30일 첫 방송을 탄 KBS <혼례대첩>은 고대의 결혼 중매인들을 신격화하면서 이들이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과장이 매우 심하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과거로 가면 갈수록 중매제도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점은 <시경>·<주례>·<맹자>·<전국책> 같은 문헌들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매(媒)·매작(媒妁)·행매(行媒) 등으로 불리며 고대의 결혼시장을 선도한 이들의 매개가 없으면 결혼을 성사시키기조차 힘들었다. <시경> 남산 편에는 "아내를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나? 중매가 없으면 안 되네"라는 시구도 있다.

맹자는 제자백가 중에서 진보적인 편에 속했다. 그런 그도 <맹자> 등문공 편에서 중매 없는 결혼을 천시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군자가 벼슬을 어려워하지 않고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중매 없이 결혼하는 일에 비유했다. "부모의 명령과 중매장이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 틈을 뚫고 엿보며 담을 뛰어넘어 따라다니면 부모와 국인(國人)들이 모두 천하게 여긴다"고 지적했다. 사대부가 관직 앞에서 초연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중매 없이 결혼한 사람처럼 천대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국인(國人)은 '나라 사람'이나 '백성' 혹은 '국민'으로도 번역되지만, 국(國)이 도성을 뜻하던 시절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단어로도 번역돼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시절에는 국인이 도성 사람을 뜻했다. 도성에는 노비도 살았지만, 왕족과 귀족이 주로 살았다. 그래서 국인은 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맹자는 중매 없는 결혼은 그런 국인들의 천시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의연함을 잃고 관직에 목매는 사대부의 모습을 거기에 비유한 것은 맹자를 비롯한 고대인들이 연애결혼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준다.

<관자>는 중매 없이 결혼하는 사람을 독재자에까지 빗댔다. 이 책 형세(形勢) 편은 "독재하는 왕의 나라는 힘들고 화가 많으며, 독재하는 나라의 군주는 비천하고 위엄이 없다"면서 중매 없는 결혼을 이에 비유했다. 그런 혼인은 추하다는 당시의 사회통념을 전제로, 독재자 역시 그 정도로 추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중매를 받아 결혼하라'는 말은 권고에 그치지 않고 법률규범으로 발달했다. 당나라 법전인 <당률>의 주석서인 <당률소의>에는 "시집가거나 아내를 얻을 때는 중매인이 있어야 한다", "혼인을 할 때는 반드시 중매인을 세운다"는 규정이 나온다. 중매결혼이 법적으로 강제된 시대도 있었던 것이다.

중매없이 결혼한 사람들
 
  KBS <혼례대첩> 한 장면.
ⓒ KBS
 

물론 중매 없이 함께 사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과 아버지인 김서현처럼 연애결혼을 한 사람들도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대신, 이런 사람들은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부부에게서 태어난 김유신이 훗날 국가지도자로 성장한 사례도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문 예외였다.

중매혼의 강제는 대중을 토지에 묶어놓고 안정적으로 조세를 거두며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던 농업시대 왕조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측면이 컸다.

진시황의 어머니와 연인관계였던 여불위의 저서가 <여씨춘추>다. 국가 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 중춘기(仲春紀) 편에 중춘인 음력 2월에 중매의 신인 고매신(高禖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제사를 위해 천자는 물론이고 왕후와 후궁들도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여씨춘추>는 말했다.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 부부까지 나서서 중매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 시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매 없이 혼인하는 것은 신을 거역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그런 퍼포먼스까지 거행했다는 것은 고대 국가들이 대중에게 중매를 얼마나 강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완벽한 규범이 됐던 것은 아니다. 중매혼의 중요성이 오랫동안 강조됐다는 것은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는 아닐지라도 적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중매혼을 어기는 사례는 사대부가에도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전 의령현감 서유영이 정리한 <금계필담>은 선조 및 광해군 때의 정승인 심희수가 어떻게 결혼했는지를 들려준다. 중국어에 능통한 심희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를 상대로 외교 활동을 펼쳤고, 종전 후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냈다.

그가 과거시험에 최종급제하기 몇 년 전인 20대 초반 때였다. 이때 그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라는 바위 근처를 지나갔다.

그 바위 근처에 거주하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은 방안에 앉아 길거리의 남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전직 재상의 양녀인 그는 당시의 관념으로 볼 때 매우 모범적인 여성이었지만, 자기 손으로 자기 남자를 고른다는 '발칙한'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을 골라주겠다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필운대 근처의 작은 집을 구해 행인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무살 전후의 심희수가 자기 눈앞을 지나가는 순간, 이 여성은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그런 뒤 말을 걸었다. "마침내 그를 불러들여 정을 통했다"고 <금계필담>은 말한다. 한동안 열애한 두 사람은 심희수의 수험 생활을 위해 몇 년간 헤어졌다가 합격한 뒤에 혼례를 올렸다.

이런 식으로 연애결혼을 한 뒤, 세상의 이목을 감안해 중매결혼으로 위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 반영하는 풍경이 당나라 때 소설인 <이왜전>에 나온다. 소설 속의 이왜(李娃)는 수년간 동거한 남자와 혼례를 올리기 전에 중매인의 도움을 형식상 거쳤다.

'자매'로 불린 사람들의 결혼
 
  KBS <혼례대첩> 한 장면.
ⓒ KBS
 
그런데 그런 형식조차 존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소설 속의 이왜는 중매인의 중개를 거치는 '성의'를 표시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성의표시를 무시했다. 이런 사람들의 결혼은 자매(自媒)로 불렸다. 자기가 자신을 중매하는 행위로 비친 것이다. 

그런 자매결혼이 일어나면 여성이 더 큰 비난을 받은 듯하다. 독재정치를 중매 없는 혼인에 비유한 <관자>도 이를 여성의 문제로 규정했다. <관자>는 독재 군주를 언급한 직후에 "자매하는 여성은 추하고 믿음이 없다"고 말했다. '자매하는 사람들'이라 하지 않고 '자매하는 여성'이라 한 것은 중매 절차가 없었을 경우에 어느 쪽이 더 큰 비난을 받았는가를 느끼게 해준다.

연애결혼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모습은 조선시대 어전회의에서도 발견된다. 음력으로 성종 8년 7월 18일자(양력 1477년 8월 26일자) <성종실록>에는 사대부 여성들이 "자매하여 사람을 따르는" 실태를 임금이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양반가 여성들이 중매 없이 남자를 따르는 일이 많다고 임금이 혀를 찼던 것이다.

중매 없는 혼인은 두 당사자의 문제이지만, 이를 여성의 잘못으로 돌리던 풍경을 성종의 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중매혼이 지켜지지 않으면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사례들이 눈에 띈다는 것은 이 제도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족쇄가 됐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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