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지금…당신은 ‘Fake Work’ 중 [경영전략노트]
힘들게 입사해 왜 나올까
무의미한 일 시키는 회사
차라리 워라밸을 선택
지금 당장 당신의 회사 책상을 한번 훑어보시길.
달력에는 각종 스케줄로 꽉 차 있고, 각종 컬러 펜으로 메모된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지 않은지. 책상 위에 각종 서류가 널브러져 있고, 모니터에는 여러 개의 엑셀과 파워포인트 파일이 열려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혹시라도 상사가 내 자리를 둘러볼 때를 대비해 ‘바쁜 척’ 콘셉트로 세팅한 것은 아닐까.
당연한 얘기지만 당신은 정말 일이 넘쳐 수많은 서류와 메모를 안고 살 수 있다. 또는 정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냥 어지러운 책상을 방치할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보여주기식 일, 즉 ‘가짜 업무’로 시간을 때우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가짜 노동(Pseudowork)’이라는 책을 쓴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분석이다.
보고 위한 보고·형식적 회의 등
젊은 세대에게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주요 공기업이나 대기업 입사 경쟁률은 100 대 1을 훌쩍 넘긴 지 오래다. 한편,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나타난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를 금방 옮기는 ‘대퇴사(Great Resignation)’ 현상이다. 이뿐 아니다. 조직 내에서 굳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 주어진 일만 소극적으로 처리하는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도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MZ세대를 중심으로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이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MZ세대가 개인 생활을 앞세워 일을 등한시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서다.
다른 분석도 있다. MZ세대 입장에서 보면 현재 주어진 일과 장차 주어질 일이 자신의 미래 가치를 높이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걸 알기에, 워라밸이라도 확실하게 챙기자는 게 본심이라는 설명이다. MZ세대에게 ‘진짜 일’을 부여한다면 이직이 줄어들고 업무 몰입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일을 늘리는 일은 ‘가짜 일(Fake Work)’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조직 내 만연한 가짜 업무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짜 노동’ 저자들이 든 사례는 이렇다.
· 회의 참석을 위해 하고 있는 업무를 미룬 적 있다.
· 보고서 분량을 의식해 불필요한 자료를 추가한 적 있다.
· 자리를 비울 때 언제든 금방 돌아올 것처럼 모니터를 켜놓고, 책상 위에 서류를 펼쳐놓는다.
· 할 일을 일찍 마치고 퇴근할 때까지 허송세월한 적 있다.
· 업무 시간보다 야근할 때 일의 능률이 더 높은 것 같다.
· 내 업무가 끝났는데도 상사나 다른 팀원 업무가 끝나길 기다리며 퇴근하지 못한다.
· 퇴근할 때 눈치가 보인다.
이런 현상은 사무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조직 성과와는 관련 없는 보여주기식의 일, 성과 없이 시간만 되면 열리는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각종 회의와 미팅, 메모지 한 장으로 끝낼 수 있는 안건을 보고하는 데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일, 사실상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일인데도 보고를 위한 보고, 끊임없는 서류 작업, 갈등만 조장하는 회식 등 셀 수 없이 많다.
잡코리아는 최근 남녀 직장인 862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야근 빈도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했다. ‘평소 야근을 얼마나 자주 하느냐’는 질문에 ‘자주 한다’고 답한 이가 28%나 됐다. 응답자 절반은 ‘가끔 한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야근을 하는 이유다. 근무 시간 내 일을 끝내지 못해서라는 답이 가장 많았지만(58%), 야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업 문화와 상사 눈치 때문이라는 응답도 20%로 적지 않았다. 굳이 야근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가짜 일을 하며 야근을 한 셈이다.
가짜 일에 허덕이는 건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예를 들어 눈치 보느라 퇴근을 하지 못하는 문화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가 아니다.
“5시쯤 그날의 할 일을 모두 마쳤지만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8시까지 여전히 많은 차와 오토바이가 있었다. 절대 퇴근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억지로 책상에 앉아 그냥 페이스북을 확인하거나 대답할 가치가 없는 연락에 답하고는 했다. 어느 날은 어슬렁거리며 다른 동료들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짜 노동’ 책에 담겨 있는 덴마크 직장인의 모습이다. 저자들은 “직장인이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 시간 중 실제로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짜 일이 왜 생길까
전략 자주 바꾸거나 관료주의 문제
2013년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s)이라는 현상에 관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글을 썼다. ‘불쉿 잡’은 ‘쓸모없고 무의미한 직업’이다. 그가 언급한 직업은 인사 관리 컨설턴트, 금융 전략가, 기업 법무팀 변호사 등으로 쓸모없다 단언할 수 없는 직종이다. 그러나 이 글은 파급 효과가 컸다. 의외로 자신의 직무를 ‘불쉿’이라고 여기고 일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직업뿐 아니라 직무에 있어서도 쓸모없는 ‘불쉿’ 일들이 넘친다.
또 다른 책 ‘가짜 일 vs 진짜 일(원제: Fake Work)’의 저자 브렌트 피터슨은 “회사 전략과 목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가짜 일로 정의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인데 회사 방향과 맞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가 되는 업무다. 끊임없는 가짜 일 속에서 조직원은 스스로 번아웃에 빠지고 회사는 자금과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가짜 노동’과 ‘가짜 일’ 저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가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짜 노동’의 저자들은 “바쁜 게 미덕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가짜 노동을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직원들이 굳이 바쁠 필요가 없는데도 바쁜 척을 하도록 만든다는 설명이다. 관리자 입장에서 본다면 직원이 바쁘지 않으면 ‘조직 축소’의 위기에 내몰릴 수 있어 바쁜 (또는 바빠 보이는) 직원을 선호한다고 했다.
브렌트 피터슨은 다른 이유를 찾는다. 직원이 회사가 원하는 목표와 업무를 제대로 모를 때, 우선순위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가짜 일이 양성된다. 동료 간 성격과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소통과 팀워크가 없거나 전략이 불합리하거나 전략과 실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가짜 일이 넘쳐난다고 본다. 관리 프로세스의 오류 또는 기업 문화의 결함 등도 가짜 일이 생기는 이유다. 브렌트 피터슨은 “직원 56%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81%는 당장 최우선 전략이 무엇인지 모른다”며 “심지어 73%는 자신이 하는 일이 회사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한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0명 중 9명 이상은 지난해보다 올해 더 많이 일했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이런 설문을 토대로 보면, 직원은 ‘열심히’ 일하지만 정작 회사 업무의 방향과 의미를 모른 채 ‘가짜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셈이다.
가짜 일을 수행하는 조직원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가짜 일의 원인 제공자는 주로 경영진이다. 예를 들어 전략을 너무 자주 바꾸는 CEO는 가짜 일을 양산한다. 조직원이 회사 목적이나 비전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소한 프로젝트도 층층이 직급을 거쳐야 하는 조직 체계를 유지하는 CEO도 문제다. 가짜 일을 용인하고 지원하고 심지어 보상까지 해주는 경영진도 가짜 일을 키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업에 매달리다 회사를 바닥으로 몰고 가는 고위직 임원, 출세에 혈안이 된 관리자, 일 잘하는 직원을 해고하는 상사 등도 해당한다. 물론 소통하지 않는 동료들, 제각기 다른 목표를 향해 치닫는 팀원들, 헛일인 줄 뻔히 알면서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일선 근무자들도 모두 ‘가짜 일 연루자’다.
조직원은 가짜 일을 왜 하는 걸까. 전문가 해석은 복합적이다. 브렌트 피터슨은 보상을 위해서라고 했다. 정작 회사 자금을 낭비하는 쓸데없는 일이지만, 나의 월급을 늘어나게 하고, 승진할 수 있는 표면적인 수치들(예를 들어 보고 시간이나 횟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에 따라 돈을 받는 경우는 더욱 심하다. 20분짜리 일을 2시간 분량으로 만들어 보상을 받는다. 그는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일수록 인사 고과가 더 좋게 나오고 밤을 새웠다고 칭찬받는 사례가 허다하다”고 했다.
효율 높인다면 주 4일제도 가능
최근 주 4일제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삼성전자는 매주 필수 근무 시간(40시간)을 채우면 월급 날인 21일이 속한 주의 금요일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했다. SK텔레콤과 카카오도 주 4일제를 시범 운영 중이다. CJ ENM, 우아한형제들, 비바리퍼블리카, 휴넷 등이 현재 부분적 또는 완전한 주 4일제를 도입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업무 방식의 변화’가 생기며 주 4일 근무제 도입에 불을 지폈다고 해석한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경영학 박사)은 “기업이 재택근무나 근무 시간 단축 제도를 도입했는데도 기업 생산성에 큰 악영향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많은 국내 기업이 코로나19 기간에도 실적이 향상되는 성과를 거두며 노동 시간 단축도 고민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가짜 일을 제거하는 작업은 노동 시간 단축을 향한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는 1958년에 발표된 ‘파킨슨의 법칙’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영국 역사학자이자 경영 연구자인 노스코드 파킨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사무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이 법칙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식민지들이 스스로 자치정부를 수립하며 영국 식민성이 관리해야 할 지역은 계속 줄어들었다. 그러나 행정 직원 수는 평균 5.89%씩 증가해 1935년 372명이었던 직원이 1954년 1661명으로 불어났다. 그는 2가지 관점에서 이런 현상을 설명했다. 공무원이 과중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때 자신의 부하 직원을 늘린다(부하 배중의 법칙). 부하 직원이 늘어나면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를 부하 직원에게 지시하고 보고받는 등의 과정이 파생돼 서로를 위해 일거리를 제공한다(업무 배증의 법칙). 결국 조직이 커지며 사람이 늘어난 만큼 일자리가 필요해진다. 파킨슨은 1996년 폴란드의 한 청년 소방대원이 자신의 소방 업무를 만들기 위해 10차례에 걸쳐 방화를 저지르다 붙잡힌 사례를 언급했다. ‘일을 위한 일을 만든’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파킨슨 법칙은 노동 시간에도 적용된다. 시간을 더 준다고 업무 성과가 늘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조직원에게 10시간을 주면 10시간에 일을 끝낸다. 똑같은 일의 업무 기한을 2시간으로 정하면 2시간 만에 해결한다. 똑같은 일을 해결하는 데 주어진 시간을 다 소진하는 식이다. “어차피 야근할 거 지금 하지 말고 이따 해야지”라며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보내다 막판에 속도를 올려 처리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가짜 노동’의 저자들은 업무 시간을 빡빡하게 짜고 나머지 시간을 휴가로 돌린다면 업무 효율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짜 일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짜 일로 성과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브렌트 피터슨은 “가짜 일을 모두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도 “본업에서 부수적으로 더해지는 서류 작업과 보고 업무부터 줄이라”고 조언한다. 소통이 활발한 조직 문화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프로젝트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는 허다하다. 불필요한 일을 중복해서 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소통은 물론이거니와 잡담과 같은 비공식 소통 채널을 열어둬야 하는 이유다. 직원이 가짜 일에 시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가짜 일을 만들어 진짜인 척 꾸미는지는 소통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2호 (2023.11.01~2023.11.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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