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 되니 엄마 생각이 납니다

김은미 2023. 11. 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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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마트에서 울다 >를 읽고 그리운 엄마를 기록할 결심을 하다

[김은미 기자]

"어르신 무 어떻게 해요?"
"얼마나 필요한데? 한두 개 필요하면 그냥 갖다 먹어."

작년 11월. 퇴근하는 길에 집 근처 밭에서 김장 무를 샀다. 올해도 작년에 무를 샀던 동네 어르신의 밭에는 무가 한창이다. '아침, 저녁 제법 쌀쌀해졌고 곧 김장철이 오겠구나' 유난히 높은 하늘이 노랗고 빨간 단풍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아침에 엄마 생각이 났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엄마는 어김없이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잠을 자는 건지 다시 고향 집에 갈 채비를 하는 건지 모를 달뜬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 좋은 배추와 무, 양념으로 쓸 갓과 쪽파, 마늘과 생강을 샀다. 깨끗한 추젓과 액젓은 물론이고 멸치젓갈을 1킬로그램쯤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해. 나도 김장하는 거 배우고 싶어."
"알았어."

엄마는 늘 대답은 철석같이 하지만 내가 아이 젖을 물리고 안아 재우는 사이 말없이 욕조를 씻고 물을 받더니 소금을 풀었다. 아이가 잠들고 거실로 나갔을 때 배추는 이미 소금물에 샤워 후 굵은 소금을 켜켜이 바르고 입욕을 한 후였다.

손을 씻고 나오는 엄마와 나란히 거실 바닥에 앉아 등을 소파에 기댄 채 우리 딸 볼 마냥 빨간 홍시를 하나씩 먹었고, 드라마를 보다 웃노라면 엄마는 또 말없이 베란다로 나갔다. 멸치젓갈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끓인 것을 채에 붓더니 살그머니 들어왔다.

뭐든 눈대중으로 계량 없이 음식을 하는 엄마는 설명을 안 했다. 나는 그저 웅크린 엄마의 등 뒤에서 김장에 들어가는 재료를 손질하는 엄마를 바라보거나, 베란다에서 욕실로 다시 주방으로 다니는 엄마를 볼 메인 내 목소리만 졸졸 따라다닐 뿐이다. 엄만 내게 쪽파와 마늘, 생강 까기와 빻기, 걸레질 하기 등 허드렛일만 시켰다.
 
▲ H마트에서 울다 책표지 민트밭에서 찍은 책 사진
ⓒ 김은미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 마트에만 가면 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 < H 마트에서 울다 >는 철없던 딸이 엄마의 질병과 죽음 앞에서 진한 사랑과 슬픔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다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위로를 얻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찾는 성장 이야기다.

엄마가 암 선고를 받자 미셸(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 병간호를 자처한다. 미셸은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에도 사그라져가는 엄마가 고통스러운 투병 후 돌아가시자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사이가 나빴던 아버지와 회복을 위한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지만 회복되기는커녕 상처만 안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날이 떠올라 괴로웠다. 뜬금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의 고리에 불이 붙으면 그동안 억누르려 애쓰던 모든 기억이 내 마음 맨 앞자락으로 훌렁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엄마의 희뿌연 혀, 보라색 욕창 자국,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엄마의 무거운 머리, 저절로 번쩍 떠진 눈, 하지만 내면의 비명이 텅 빈 가슴을 뚫고 나와 온몸을 소용돌이치며 뒤흔들 뿐, 그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 353쪽
 
미셸은 결국 상담을 받지만,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한다. 다른 방법으로 모색한 것은 유튜브를 보며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내가 한 음식은 모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각각의 향과 맛이 잠깐이나마 나를 멀쩡했던 우리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 354쪽
 
"그러고 나서 김치 양념이 밴 바닥을 벅벅 닦았다. 김치를 만드는 과정이 세 시간 정도 걸렸지만, 그 노동은 생각보다 간단했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주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 360쪽
 
2011년. 우리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 치매 초기로 약을 복용 중이던 엄마는 군인인 오빠가 멀리 발령 나고 혼자 살게 된 지 2년 만에 마음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날이 추워져도 더는 엄마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고 끝내 엄마의 김장 레시피는 알지 못했다.
내 김장 레시피는 미셸이 유튜버 '망치' 여사에게 음식을 배우듯 매년 인터넷 검색으로 이루어진다. 배추양에 따른 소금물의 농도와 배추에 뿌리는 소금의 양. 고춧가루와 젓갈, 그 외 양념의 양이 대략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1년에 한 번 '김장'이라는 의식은 엄마의 등 뒤로 보고 배운 이미지가 좌우한다. 엄마가 김장할 때 하던 행동들을 기억에 떠올리며 어떤 음식을 만들 때 보다 숭고하게 치러진다.
 
"이제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숙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쌉싸름한 일인지. 자식이 엄마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한 주체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기록 보관인을 기록하는 일이." - 372쪽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언니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엄마를 모시던 언니의 연락을 받았어도 시간을 내어 곁을 지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의 유품을 챙기러 고향에도 가지 않았다. 엄마의 투병 이후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않는 버릇을 지니게 됐다.

그로 인해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추천받아 읽었을 때 건성이었다. 미셸의 이야기가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느꼈다. 의무감으로 읽으며 몰입하기보다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지나치듯 빨리 책장을 넘겼고 그녀가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어 가는 이야기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

조던 피터슨은 그의 책 <질서 너머>를 통해 말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자세하게 글로 써보라고. "치유의 힘은 그저 감정을 표출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그 힘은 정교한 인과론을 발전시키는 데서 나온다. 당신은 씁쓸한 진실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미셸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더 큰 치유와 성장을 경험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하며 자신의 고통과 직면하는 기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또한 더 굳게 확립하게 됐으리라. 음식을 만들며 엄마의 말을 기억하는 것, 등 떠밀려 했던 행위를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 엄마에 대한 기억을 오래 곱씹으며 기록하는 일을 하는 일은 그녀를 단단한 사람이 되게 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한쪽 마음에 엄마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 미안함을 안고 산다. 우리에게 닥쳤던 아픔을 회피했기 때문이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 했던가. 만나면 이별은 정해진 것이요 헤어짐이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뜻이다. 이제 시간을 들여 엄마에게 닥쳤던 일을 마주하고 우리의 추억을 기록해야겠다. 마음에서 아픔을 떠나보내고 내 기록으로 다시 마주할 엄마 모습을 기대하면서.

어쩌면 <H 마트에서 울다>가 내게 온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요. 내 기록 여정에 새로운 신호탄이 된 것 같다.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 과거의 공포에 자발적으로 맞서고 트라우마가 훨씬 적은 인과적 설명을 발견하자 마침내 그 기억과 관련된 공포와 수치심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 <질서 너머>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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