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전 아버지가 학살된 황망한 이유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기자말>
[김영희 기자]
▲ 화령골 발굴지에서 나온 유해와 출토된 유품 종류 |
ⓒ 김영희 |
경남 진주 화령골은 노용석 부경대학교 교수가 꾸린 발굴단에 의해 2021년 5월 5일부터 8일간 진행되었다. 발굴 예산은 김경수 당시 경남도지사가 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원받았다.
▲ 제11-1 발굴지 관지리 산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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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들이 드러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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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단원 김상학씨(맨 왼쪽)와 필자(왼쪽에서 세 번째)는 발굴 마지막 단계에서 유해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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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에 열중하는 단원들. 원 안에 있는 게 필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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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령골 유해발굴 봉안제 지낸 후 발굴 단원들과 함께(왼쪽에서 첫 번째 노용석 교수, 네 번째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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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마지막 날, 유족의 요구로 발굴지 우측 일부를 재확인해 보자고 하였다. 필자와 두 명의 발굴단이 흙을 파기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강이뼈가 나오기 시작하여 환호하며 조심스럽게 혼신을 다하여 발굴했다. 다행이었다.
발굴하다 보면 발굴 면적과 기간이 정해진다. 하지만 그 외 위치를 유족이 요구할 때가 있다. 확장 발굴했을 때 유해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이지만, 노출될 경우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 70여 년 어둠 속에 묻혀있던 원혼이 필자 손으로 드러날 때, 그 희열은 발굴자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 화령골 유해발굴 봉안제 |
ⓒ 김영희 |
▲ 화령골 유해발굴 봉안제 |
ⓒ 김영희 |
학살된 아버지, 찾아 나선 할아버지
증언자 백자야씨의 아버지 백갑흠(당시 27세)은 1950년 6월 11일(음력) 명석면 관지리 산173번지에서 학살되었다.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던 중 면사무소에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으나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 한 마리를 팔아 목돈을 마련하여 진주형무소를 찾았다. 감금된 아들을 구하고자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힘없이 형무소 옆 둑에 넋을 잃고 앉아있는데, 마침 군용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아버지가 언 듯 보였다. 순간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봤는지 몸을 돌려버렸다고 한다.
▲ ① 학살지 산173 발굴함 ② 발굴한 산72 ③ 백갑흠의 학살지 산73 이곳은 과수원으로 개발돼 유해는 훼손된 상태. |
ⓒ 김영희 |
아버지는 보도연맹원에 미가입자인데 왜 잡혀갔을까?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직접 가입하지 않았어요. 잡혀간 사연은 따로 있어요. 동네 이장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논이 위아래로 있었는데, 가뭄이 오거나 모내기를 할 때 물로 다툼이 허다했대요.
당시 모내기 철이라 논에 물을 대주지 않는다고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고, 결국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냈나 봐요.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이장이 아버지에게 도장이 필요하다고 해 줬더니 '보도연맹 가입 서류'에 도장을 찍어버린 겁니다."
이웃 간에 서로의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본인의 허락도 없이 도장을 함부로 사용한 이장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학살지로 갈 때 억울하다고 소리 지른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저씨,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골짜기를 찾아갔다.
관지리 학살지는 붉은 피로 물들어 난장판이 되었다. 계곡을 타고 핏빛 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냄새와 악취, 파리 떼로 인하여 숨도 쉴 수가 없는 상태에서 낯익은 벨트 하나가 시신 틈새로 드러났다. 아버지는 평소 제부의 벨트가 좋아 보인다며 빌려 차곤 했다. 마침 그 벨트가 할머니 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이고! 저 벨트 우리 아들 벨트다."
아버지는 얼마나 소리를 치고 발버둥을 쳤던지 머리에 총을 너무 많이 맞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저씨가 바지게에 시신을 담아지고 20km를 걸어서 집에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집 뒷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필자는 딸 백자야, 사촌 동생과 함께 고인의 묘지를 찾아갔다. 71년이 지난 무덤은 잔디 하나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긴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편 시신이라도 찾아서 자식한테 참배라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족들의 대부분은 피학살자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필자는 희생자 고 백갑흠씨의 묘지에 증언자 백자야씨, 사촌 동생과 함께 다녀왔다. |
ⓒ 김영희 |
남겨진 어머니와 딸
당시 백자야의 어머니는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이었다. 그러나 군인은 집에 찾아와 '남편이 어디 있냐'며 어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대고 위협했다. 남편이 학살된 후 어머니는 매일 울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삼촌은 이곳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며 모든 전답을 처분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삼촌은 부산에서 집과 쌀장사를 할 수 있는 가게를 얻었다.
그 집에서 어머니는 삼촌의 가족, 할머니와 함께 백자야를 키우면서 살았다. 할머니는 '내 며느리, 내 며느리' 하면서 잘해주셨다. 그 이유는 백자야를 두고 도망갈까 걱정되었고, 손녀가 고아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슴 깊이 묻은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백자야에게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험난한 고통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49세의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남편을 따라 떠났다.
백자야는 선명여중을 다녔지만, 어느 날 할아버지가 '너는 공부할 필요 없데이' 하면서 등록금을 주지 않아 중퇴했다.
결혼해 살던 어느 날, 백자야는 남편이 높은 점수에도 기술자 시험에도 불합격해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유가 궁금하여 자세히 알아보니 '아버지의 연좌제'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백자야는 10년 전 동전마을 근처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모교가 폐교된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폐교를 임대해 캠핑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가 학살당한 곳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아버지가 가까이 있어 마음이 푸근하다'고 말한다.
그 아픔의 흔적
대전유족회장 전미경
첩첩이 쌓인 먹구름 찢어 가르며
장맛비 장대처럼 쏟아지던 그 여름
애국 충절의 혼이 요동치는 남강의 푸른 물줄기
살인마의 총칼 앞에 육신은 나자된 채
검붉은 선혈 흘러 흘러 물들고
핏빛 여명 헤치고 울부짖으며
썩은 나무토막처럼 죽어 뒹구는
용산치 진성고개 초록빛 산하
뼈를 묻고 살을 묻던 콩밭골 숯막 지역
꺽꺽 차오르는 분노 목 안으로 밀어 삼키며
죽어야 했던 너덜겅 폐광지역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붉은 핏자국
기어이 가고 마는 저기 저 황천길
끔엔들 잊을 손가 그날을 잊을소냐!
어찌 짓밟아 묻으려 하느냐!
2011년 5월 7일 진주 피학살자 추모하며
- <진실을 노래하라> 중에서
10회 북한 그리고 피카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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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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