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를 꿈꾸다 엄마가 된 그녀의 일상

김성호 2023. 11. 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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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75] 제10회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작 <자유연기>

[김성호 기자]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승자독식의 명백함은 차라리 솔직함이며 공정함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요새는 불투명한 과정과 편법이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얻는 끝장 승부의 엄정함은 평범한 사람들을 일으켜 승리를 향해 끝없이 내달리도록 이끈다. 이것이 자본주의와 경쟁사회의 동력이며 미덕임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세상 모든 것엔 단면이 있다. 누군가에겐 화려한 스타가 될 기회의 장이 다른 누구에겐 1등만 기억하는 치사한 세상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팝스타 ABBA(아바)는 명곡 'The Winner Take It All'에서 '승자는 모든 걸 가져요. 패자는 몰락하죠. 간단하고 명백해요. 내가 어떻게 불평하겠어요'라고 노래했다. 10년 전 토마 피케티는 명저 < 21세기 자본 >을 통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격차가 끊임없이 커져가는 것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효과임을 증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 승자독식, 1등만 기억하는 치사한 세상이 우리 곁에서 엄정히 작동하는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 같은 세상이 옳다는 포기와 수긍, 내면화로 이어져선 안 될 일이다. 최상단만 바라보는 서럽고 치사한 세상일수록 더욱 잊히고 소외되기 쉬운 곳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이 시대를 아바가 노래하고 피케티가 분석한 것 또한 그저 수긍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닐 터가 아닌가. 그럴수록 치열하고 끈기 있게 작고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마음이 힘을 얻어야만 하는 일이다.
 
▲ 부천노동영화제 포스터
ⓒ 부천노동영화제
 
그럼에도 주목해 마땅한 무엇이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크고 화려한 무엇이라 여긴다. 몸값이 수십 억 원을 호가하는 스타들과 수백만을 넘어 천만관객에 도달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 CG와 분장, 스턴트 등 눈을 사로잡는 효과들, 세계 유수의 영화제까지 모두가 크고 화려한 것 일색이다.

다른 많은 산업이 그러하듯 영화 또한 이면이 있다. 스타 뒤엔 최저생계도 꾸리기 어려운 수많은 무명배우가, 격무에 시달리는 스탭들이, 희미한 빛을 쫓는 부나방처럼 제 삶 전체를 갈아 예술에 다가서려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한 해 개봉작 가운데 손익분기를 넘는 영화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제작비 지원 프로그램에 공모하는 수많은 시나리오 가운데 소수만이 투자를 받아 제작되고, 그중 다시 일부만이 극장에 걸리게 된다.

영화제는 어떠한가. 한국에도 수많은 영화제가 있다지만 부산과 전주 정도를 제외하면 기자와 평론가가 몰려드는 영화제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이 끊긴 뒤 사라진 자생력 없는 영화제가 여럿이고, 적은 지원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역시 작은 영화제가 여럿이다. 제천음악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 등 작지만 저만의 색깔을 선명히 발해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소수의 영화제가 있지만, 대다수는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저들만의 잔치로 끝나기 일쑤다.

그 같은 환경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화제가 있다. 수많은 평론가와 기자들이 찾지 않는 영화제를 찾아가보자고 시작한 길에서 나는 몇 개의 의미 깊은 영화제와 만났다. 영화를 통해 작지만 귀한 목소리를 붙들어보자는 기획으로, 그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기엔 아쉬움이 많았다. 몇몇 이름난 영화제에 쏟아지는 큰 관심의 일부를 이토록 작은 목소리로 돌려볼 수는 없을까.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부천노동영화제를 2년 연속 찾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식
ⓒ 김성호
 
부천노동영화제가 고른 개막작 <자유연기>

주지하다시피 부천은 문화의 도시라 불러도 좋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필두로,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부천국제만화축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이름난 행사가 수두룩하다. 이 같은 큰 행사보단 작지만 부천엔 특색 있는 영화제가 또 하나 있다. 은행잎 떨어지는 가을이면, 부천시 일원 여러 단체가 모여 진행하는 소박하지만 정감 가는 부천노동영화제가 그것이다. 이 영화제는 매년 일상 가운데 당연한 무엇쯤으로 잊히기 쉬운 노동이란 주제로 영화를 골라 상영하고 대화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주목하는 영화제로 그 역할을 공고히 한다.

예산 부족 때문인지 상영관 및 대중홍보 등에서 아쉬움이 있지만, 주어진 여건 내에서 좋은 영화를 선별해 상영하고 사람들과 나누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해도 좋겠다.

개막작은 영화제의 성격을 대변한다. 영화제 주최 측이 선별해 고른 작품으로, 영화제를 찾는 이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올해 부천노동영화제 개막작은 두 편의 중단편으로 꾸려졌는데, 그중 첫 작품이 김도영 감독의 <자유연기>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가 부천노동영화제의 오늘, 또 한국사회가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대하는 방식과 꼭 맞아떨어져서 나는 이 영화제를 다시 찾기를 참 잘한 일이라 여겼다.
 
▲ 자유연기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배우를 꿈꿨다, 엄마가 되었다

30분의 짤막한 영화는 배우 부부, 그중 아이를 낳고 기르는 아내 지연의 이야기다. 한때는 꿈 많은 배우였던 지연은 육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남편은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로, 종일 연기다 극단의 부대활동에 늦는 날이 많다. 아이는 사랑스럽지만 귀찮고 버거운 존재이기도 하다. 극중 지연의 말처럼 아이는 사랑스러운데 지연이 행복한 것 같지는 않은 삶이 이어진다.

남편은 제 꿈이었던 일을 어찌됐든 하고 있는 중이다. 종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그에게 타박을 해보지만 그 모두가 업무의 연장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일 밖에 없다. 지연이라고 극단 생활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극단 배우의 삶을 이어가는 남편과 온통 애와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저의 삶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이따금 남편이 함께 먹자며 매운 떡볶이를 사오면 수유 중이라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저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여 실망할 때도 있다. 그렇게 소소하지만 소소하지만은 않은 일상이 종일 아이를 키우는 아내의 세계다.

지연에게도 꿈이 있었다. 아니, 아직도 선명한 꿈이 있다. 지연은 꽤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에게 한 통 전화가 걸려온다.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목소리다. 영화, 그것도 꽤 이름 있는 감독의 신작 오디션 제안이다. 메일로 들어온 오디션 연기 대본을 보니 분량이 꽤 있는 역할인 모양, 마음이 절로 들뜬다. 남편에게 아이를 봐달라는 얘기도 해보지만 극단 일정이 있단다. 나이든 친정 아버지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 자유연기 스틸컷
ⓒ 부천노동영화제
 
모두에게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음을

영화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마음처럼, 또 기대처럼만은 풀리지 않는 인생을, 그럼에도 감당하고 걸어 나가는 생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오디션 자리에서 하는 지연의 자유연기를 인상 깊게 잡는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율하게 하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 속 니나의 저 유명한 대사를 지연의 입으로 듣게 된다.

지연은 연극에 대한 신념과 정열을 잃어가는, 사랑의 고뇌와 아기에 대한 걱정 가운데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여자가 되어가는 건 아닌가를 고민하는 니나가 되어 마음 다해 연기한다. 어쩌면 세상 가장 보잘 것 없는 무대, 가장 형편없는 관객 앞에서, 어쩌면 생애 최고의 연기일지 모를 연기를 해낸다. 중요한 것은 명성이나 갈채가 아니라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견디어 나가는 것이라는 대사를 하던 순간은 원작에서만큼이나 감격적이다.

니나가 다다르는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모두 알 것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성공하진 못했어도, 신념과 사명을 갖고 나아가는 삶과 연기가 그녀 앞에 펼쳐진다. 짊어진 이를 오열하게 하는 버거운 십자가를 맨 지연이 그렇게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그럼에 이 영화 <자유연기>는 아름답다 해도 좋겠다.

대부분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을 작은 영화제, 처음 보는 영화와 낯선 배우들, 그러나 그 안에 아름다움이 담겼다. 그렇다면 이 시대 어느 평론가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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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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