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K-통신]⑤이제는 글로벌 싸움…해외 진출 전략 어떻게 짤까
"과욕 말고 B2B 전략을" 중소기업들과 협업"
규제·보호 틀에서 벗어나 투자·데이터 활용을
SK텔레콤과 KT는 해외 시장 진출을 도전했다가 쓰라린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다. SK텔레콤은 '힐리오(Helio)'라는 이름으로 2006년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전역에서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적자로 2년여 만에 철수했다. KT도 해외 사업을 벌였다가 부진의 늪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KT는 아프리카 지역에 통신 수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2013년 르완다 법인을 설립했다가 10년간 누적 2000억원이 넘는 적자가 발생했다.
이처럼 이통사에 해외 진출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하지만 국내 이동통신 시장이 포화상태이고, 인구 감소 현상이 역력한 점을 감안하면 글로벌 시장 공략은 꼭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K-팝, K-콘텐츠가 세계 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듯이 우수한 통신 기술과 노하우를 지닌 국내 통신사들이 해외에서 실패만 하리란 법은 없다는 것이다.
통신 시장을 10여년 동안 살펴본 한 연구원은 "국내 이통사들은 가입자들에게 매달 청구서를 보내고 돈을 받는 구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며 "해외 시장 진출은 과욕을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진행해야 한다. 기업과 개인 간 거래(B2C)가 아닌 기업과 기업 간 거래(B2B)를 노릴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매달 휴대폰, 인터넷 요금 받듯 해외 고객들로부터 가가호호 청구서를 내미는 방식의 사업은 통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는 "유럽 지역은 오래된 건물이 많아 통신 인프라가 노후화됐다"며 "국내에서 골목 안 집집마다 케이블, 인터넷을 구축한 기술을 가지고 유럽을 공략할 수도 있다"고 예를 들었다. 또한 이통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걸고 직접 고객을 유치하려 하기 보다는, B2B 방식으로 서서히 커버리지를 늘려가며 통신망을 확장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중소 통신 장비 업체들과 협업을 통해 컨소시엄을 이뤄야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봤다.
"정부 지원·자금력 필요..AI로 판 바꿔야"차상균 서울대 교수는 해외 진출에 성공하려면 "규모를 키우는 게 우선"이라며 현재 통신 시장 상황을 “한국전력이 3개로 쪼개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국내 통신 3사가 해외 통신사에 비해 '체급'이 밀린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공적인 사례로 싱가포르텔레콤(싱텔)을 꼽았다. 싱가포르의 대표 기업인 싱텔은 국부 펀드인 테마섹홀딩스가 최대 주주다. 정부의 지원과 자금력을 등에 업고 동남아 통신 사업자 지분을 잇달아 사들였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동남아 시장을 장악한 뒤에는 아프리카와 중동,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갔다. 글로벌 통신사로 거듭난 비결이다. 싱텔은 현재 자국 인구(545만명)의 140배에 달하는 7억7000만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차 교수는 "통신업에서 살아남으려면 싱텔처럼 자본을 제대로 활용해서 다른 나라로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KT 대표 경선에 도전했던 차 교수는 이사회 면접 당시 발표했던 직무수행 계획서를 SNS에 공개했었다. 그는 "경선 마지막 과정에서 CEO로 선택받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KT를 아끼는 분들과 함께 고민한 혁신 방안을 공개하는 것이 후보자의 도리"라고 말했다. 그 자료의 제목은 'KT, AI 세상의 판을 바꾸자'였다. 수십년간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는 KT가 국내 AI 생태계를 주도하는 기업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국방, 제조·엔지니어링, 디지털 헬스케어, 스포츠 플랫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AI 기반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고 봤다. 또한 AI 기반 고성장 신사업 비중이 10%, 20%, 30%로 늘어나면 기업가치도 그에 비례해 1.9배, 2.8배, 3.7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차 교수는 "국내에 AI 백본(Backbone·네트워크의 중추) 역할을 하는 대기업이 없으니 KT를 한번 그런 기업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것"이라고 했다.
"규제·통제 벗어나야..빅테크처럼 경쟁하라"통신사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규제 산업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사업 전개에 있어서 통신 규제가 연동돼서 따라오기 때문에 일반 빅테크처럼 자유롭게 사업을 확장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렵다"라며 "(통신사들이) 신사업을 위한 연구개발은 다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규제산업 틀 안에서 각사 경영 논리에 따라 제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보니까 한 분야에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권오상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10년 전부터 통신사들 사이에서 '탈통신'이라는 게 유행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LG유플러스가 LG텔레콤이란 사명을 버린 것이다. 브랜드까지 바꾸면서 탈통신 의지를 보였다. 권 교수는 "지금도 LG유플러스는 통신업을 벗어나지 못했다"며 "통신사들은 그동안 규제 산업 안에서 허가로 보호받아 왔다. 반면 네이버·카카오는 규제도, 보호도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잘 키워서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마인드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통신사들이 지금까지 규제 덕분에 이익을 많이 봤다면, 이제는 규제 산업이라서 성장이 막힌 상태다. 투자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가격은 통제받고 있고. 여론은 통신비 상승에 치를 떤다”면서 "다른 큰 먹거리가 있으면 통신업을 2순위로 두고 '올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일찍 신사업을 했었어야 하는데 늦은 감이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재무적 투자·데이터 활용해 K-통신 발돋움통신사가 유망한 AI 기업에 재무적 투자자로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방법도 있다. 김연학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초빙 교수(전 KT CFO)는 "정보기술 분야 스타트업들은 강한 기업가 정신, 리스크 테이킹, 과감한 수용 같은 특성이 필요하지만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가진 통신사가 그러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통신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다루기 때문에 AI나 디지털전환 등을 얘기하지만, 사실 통신사는 실적, 주가 관리가 중요하다"면서 "가입자 관리와 매출과 이익을 잘 내는 것을 더 우선시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신사업은 자회사 형태로 해야 한다. 본사가 재무적 투자자 역할만 하고 자율성을 줘서 기업가 정신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억 원 연봉을 주고 AI 담당 임원을 모셔오는 관행을 버려야 한다. 월급은 스타트업처럼 받더라도, 기업 지분을 줘서 성공하면 크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통신사가 축적해온 데이터가 신사업을 할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수경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20여년 넘게 통신사에 축적된 대한민국 국민의 데이터는 석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며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플랫폼, 클라우드 등은 통신사가 놓쳐선 안 되는 황금알"이라고 했다. 안정상 더불어민주당 방송정보통신 수석전문위원은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 속의 K-통신으로 자리 잡으려면 신기술 연구·개발 투자, 우수 인력 공급, 신 비즈니스 모델 개발, 미래 먹거리를 위한 종합 전략 수립·추진 등에 전사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통신사들은 글로벌 시장 확장을 위한 선제적 전략을 마련하고, 우수한 글로벌 테크 기업들과의 제휴를 통해 인력과 기술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오유교 기자 5625@asiae.co.kr
오수연 기자 syo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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