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트렌드]미생(未生)인 우리의 지속가능한 삶

2023. 11. 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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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피스물의 정수라 불렸던 웹툰 '미생'이 돌아왔다. 2014년에는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아직 살아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바둑의 승리 조건은 단 하나, 상대방보다 더 집을 많이 만드는 것이다. 바둑을 두는 것을 삶에 비유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년부터 연재 중인 시즌 2에서 주인공 장그래는 대기업을 떠나 옛 팀원들이 세운 중소기업에서 해외 중고차 판매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주 회차에서 윤태호 작가의 말이 마음을 울렸다. “정년(停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잣대로 내 일을 그만둬야 한다. 내가 가장 잘 해왔던 일에서 나와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배워본 적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즘 고령화로 인해 늘어난 수명 대비 빨라진 퇴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니어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왜 일하는가’라는 유명한 책에서는 ‘일하는 마음가짐’과 방향성을 다룬다. 100세 시대에는 ‘언제까지’ 일할 것인지도 중요해졌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달라진 세상과 생애주기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디서’를 중점으로 ‘지역살이’ 트렌드를 다루고자 한다. 이전 시니어 세대는 퇴직 후 ‘귀농·귀촌’이 대세였다. 지금은 ‘러스틱 라이프(Rustic Life)’가 뜨고 있다. 완전하게 ‘이도향촌’ 대신 ‘5도2촌(일주일 중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촌에서 보내기)’, 지방에서 한 달 살기, 강릉 워케이션 등이 그것이다. 자연과 시골의 매력은 즐기되, 도시 생활에 여유와 편안함을 유지하는 생활 방식이다. 베이비부머의 본격적인 은퇴와 2030세대의 관심이 더해져 그야말로 핫하다. 40년도 넘은 MBC 드라마 ‘전원일기’가 역주행을 하고 있고, tvN은 시골 풍경과 공동체 생활을 담아낸 ‘삼시세끼’, ‘갯마을 차차차’란 콘텐츠 흥행에 이어 최근 ‘콩콩팥팥(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를 시작했다. 공통점은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일하지만, 또 적당히 쉰다. 큰 벌이는 안되는 것 같지만, 먹고 살만큼은 되는 것 같다.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은둔형 자급자족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으로 향한다.

며칠 전 세종에서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지방시대, 지역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다’란 포럼이 열렸다. 한국의 경제는 단기간에 서울 집중화를 통해 고속 성장을 이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커졌다. 수도권에 몰려 빡빡한 인구밀도 속에 살다 보니 경쟁은 치열하고, 불안은 높아졌고, 주거 안정성은 떨어진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당연했다.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 가시화되자 생활인구 확대와 지역 경제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이번 포럼을 통해 ‘로컬리즘’ 연구와 현장 사례들이 균형 있게 다뤄졌다. 지역에서 민간과 공공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 지속가능한 로컬 비즈니스는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청년마을 사업을 수행하던 곳들이 중장년 세대를 위한 연결 프로젝트를 시작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공주 퍼즐랩은 시니어 세대를 위한 ‘마을생활 튜토리얼’, 영덕 메이드인 피플은 한국판 산티아고 도보여행 ‘뚜벅이 마을’이 주목할 만했다. 발제자였던 전영수 교수는 ‘로컬리즘’이 지역의 불균형을 회복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사회를 성숙 전략에 진입하게 하는 마지막 블루오션이라고 평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지역살이’는 여러 지역에서 시행 중이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딴중일기(딴 세상을 꿈꾸는 중년들의 일터 기획)’가 대표적이다. 귀촌을 하더라도 농사짓기 말고 나만의 책방, 카페, 양조장 등을 운영한다거나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된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물어볼 수 있게 구성된 탐방 프로그램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원주 지역에서만 서점이 74곳이나 등록돼 있단 것이다.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궁금해 책방 주인에게 물었다. 작업용 혹은 모임용 공간으로 사용하는 주인장도 있고 풍경종을 판매하는 등 각자의 취향을 담은 책 큐레이션을 하고, 서로 영역을 나누어 겹치지 않도록 배려한단다. 책방 투어를 만들기도 하고, 소규모 강연회나 북 페스티벌을 열기도 한다는데, 절반 이상이 퇴직하고 이주해온 시니어들이다. 경쟁보다 상생이었다. 다음 달에는 인제에서 신중년의 길잡이가 되고 싶다는 ‘패스파인더’가 팬슈머(관계인구) 지역상생포럼을 연다. 마을과 제철을 체험하고, 지역에서 청장년 연대를 강화하기 목적이 다. 전라도 남원에서는 지역 탐방을 넘어 정주인구를 목표로 하는 ‘신중년 복합 이주단지’와 ‘귀촌형 타운조성’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은퇴 후 수도권에서 여가를 즐기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신중년들의 이야기가 넘친다. 외국 가서 한 달 살아보기, 기타 동호회, 셔플댄스 추는 챌린지, 명화 감상하기 세미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역에도 할 거리가 넘친다. 일을 하면서도 ‘저녁이 있는 삶’을 통해 개인기를 발휘하며 공동체로 녹아드는 삶도 매력있다. 정년 퇴직 후 놀기만 하기에는 남은 생이 무척 길다. 더구나 이제 산업 구조적으로 50대 퇴직은 물론이고, 경영사정 악화로 30대나 40대에도 갑작스레 퇴사하게 되는 경우가 늘었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쓸모가 다하는 직종도 생길 것이다. 지역을 선택지로 열어놓고, 여유롭게 지속가능한 삶과 일에 대한 관점을 가다듬어 보자. 로컬은 이제 시작이고, 우리의 상상력만큼 열릴 것이다.

이보람 써드에이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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