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이태원역 1번 출구 돌기둥

2023. 11. 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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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있는 돌기둥입니다. 이태원역이 개통하고 2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오고 있죠. 현대인이 바쁘다 보니 대부분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제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못합니다. 물론 가끔은 지하철 출구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는 저한테 기대어 잠깐 쉬는 분도 계십니다. 가던 길에 별생각 없이 저를 발로 툭 차고 가는 이상한 분도 적잖게 있고요.

어떤 분들은 가방이나 짐을 제 위에 올려두고 열심히 휴대전화로 통화하시기도 하죠. 사람들과 달리 동네 강아지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저한테 영역표시를 합니다. 큰 관심이기는 하지만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저는 꼼짝 못 하고 서 있으며 세월의 흔적만이 아니라 이곳을 오고 간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 핼러윈 날 저녁이었죠. 제가 오랜 기간 이태원에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인파가 한 번에 몰리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제대로 앞을 보지도 못하고 자기 의지대로 걷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바로 앞에서 수백 명이 좁은 골목에 끼여버렸습니다. 이들은 꼼짝도 못 한 채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늦게나마 인파를 뚫고 구급차와 소방차가 도착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많은 분이 다쳤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돌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날 이후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시민들은 사고현장으로 와서 일면식도 없던 희생자를 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이 희생자를 위한 메시지를 제 몸에다 붙이고 국화를 두었습니다. 일부 정치인은 저랑 같이 사진 찍히면 큰일이라도 나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군요. 그래도 우리 사회에는 선량한 이웃이 더 많나 봅니다. 제가 한 덩치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 몸은 곧 추모객이 남긴 꽃과 편지로 뒤덮였습니다. 사건 당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돌이지만 저는 희생자를 기억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는 임시 추모공간이 됐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52일 동안 15만명의 시민이 애도와 기억을 위해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후 추모글과 물품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워낙 큰 사건이 일어났던 만큼 한동안 이태원을 방문하는 사람은 확 줄었습니다. 약간 쓸쓸해 보일 수도 있는 나날 속에서도 저는 돌인지라 그곳을 지켰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이태원에 돌아왔고, 과거보다는 덜하겠지만 이 동네도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많은 것이 회복되어 가는 와중에도 참사가 왜 일어났고, 누가 어떻게 책임질까 등의 문제를 밝히는 일은 정치인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미뤄졌더군요.

1년이 지나 다시 10월 말이 되었습니다. 사고현장에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조성되었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추모의 벽도 만들어졌습니다. 작년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 주셨고요. 1년 전에는 어쩌다 제가 임시로 그 역할을 맡았는데 올해에는 참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는 구절이 있다더군요. 물론 참사의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제가 막 고함치지는 않을 겁니다. 대신 제 역할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사고에 대한 충격에 휩싸였을 때나 기억이 흐려질 때나 이태원역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이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그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말이죠.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요. 저는 움직이지 못하는 돌이니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저 같은 돌을 보고도 과거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주셨다고 믿으니까요.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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