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신구·박근형의 '고도를 기다리며'
지난달 27일 공연제작사 파크컴퍼니의 서울 대학로 연습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신구(87), 박근형(83), 박정자(81), 김학철(63). 연기경력 도합 228년이라는 이들은 첫 공연이 53일이나 남았는데도 벌써 무대 동선에 맞춰 연습하고 있었다. 스태프들 앞에 놓인 기다란 책상 위에는 간식거리가 즐비했지만, 물 한 모금 마시는 이가 없었다. 행여 연기 흐름에 방해가 될까, 절로 숨죽이게 됐다. 무심히 움직이는 건 가습기에서 뿜어져나오는 수증기뿐이었다.
“우린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중 몇몇은 죽을 때까지 미쳐있고”(에스트라공-신구), “우린 시간을 때우면서 살아가는 거지. 얼핏 보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마침내 습관이 돼버리는 짓거리를 하면서 말이야”(블라디미르-박근형) 등의 대사가 시의 한 구절처럼 마음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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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출가 임영웅=고도' 50년 폐막
새 연출가에 새 배우로 새 출발
20세기 부조리극의 정수 평가
'고도'는 안 와도 연극은 계속돼
」
이들이 지난 9월 22일부터 주5일 연습 중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다음달 19일부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두 달간 공연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자,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87) 연출가가 1969년부터 2019년까지 꼬박 50년을 무대에 올린 극단 산울림의 히트작이다. 임영웅 선생이 노환으로 거동이 어려워지면서 극단 산울림이 갖고 있던 공연 라이선스가 지난해 풀렸고, 이번 공연은 새로운 제작사, 새로운 연출자(오경택)와 합을 맞춘다. 대본만 원작자 측 에이전시 요청에 따라 산울림 시절 그대로 쓴다. 임영웅 선생의 부인이자 불문학자인 오증자(86) 서울여대 명예교수가 무대 언어로 가장 잘 어울리게 옮겨놓은 번역본이다.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다. 극 구성의 기승전결이나 논리적 타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현대 연극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극은 나무 한 그루 달랑 있는 길 위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Godot)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포조와 럭키를 만나는데, 그 과정도 시종일관 난데없다. 끝내 고도는 오지 않고 그저 기다림만 계속되는 상태에서 극은 끝난다.
대사는 공연 내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맥락 없이 계속되는 등장인물들의 헛짓거리 속에서 관객이 깨닫게 되는 건 인간 존재와 삶의 불합리성이다. 조리(條理) 없는 부조리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란 걸 자각하는 순간, 황당해서 터뜨렸던 웃음이 엄숙한 성찰로 바뀐다.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서로 의미 없는 욕지거리를 해대고 나무에 목을 매려 하다가도 끈이 없다 핑계를 대는 주인공들에게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그래도 포기 못 하는 희망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 또 내일, 일관성 없이 반복되는 일상 역시 엄혹한 현실 아니던가.
한국 초연은 1969년 임영웅 연출작이 아니다. 1953년 파리 초연 이후 워낙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터라 몇몇 국내 극단에서도 무대에 올렸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작품이 1969년 대성공을 거둔 데는 임영웅 선생의 충실한 작품 해석 덕도 크지만, 운이 좋았던 것도 무시 못 한다. 공연 직전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연극 티켓부터 동이 났다. 이후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50주년 기념공연까지, 1500회 넘게 공연하며 22만여 명의 관객을 만났다. 전무송·정동환·주호성·송영창·정재진·안석환·한명구 등 ‘고도를 기다리며’를 거쳐간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이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모두 처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선다. “부담은 크지만 평소 하고 싶었던 작품”(신구), “이 작품 초연 연습 중일 때 잠깐 몇 장면을 보고 나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박근형) 등 연기 인생 내내 흠모했던 무대다. 50년 내내 남성 배우가 맡았던 럭키 역은 “작품 제작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럭키를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는 박정자 배우에게 돌아갔다.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한 문장으로 10분 가까이 쉴 새 없이 내뱉는 럭키의 대사를 그는 진작 다 외웠다.
2019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마지막으로 연출한 임영웅 선생은 당시 인터뷰에서 “임영웅의 ‘고도’는 일단락 짓는다. 앞으로 새로운 ‘고도’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 새 출발이 노배우들의 응축된 삶의 에너지와 함께 펼쳐진다. 오랜 기다림이란 인간의 숙명을 형상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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