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무언가 짓는 사람
네 번째 책을 내었습니다. 거친 생각을 서툰 글줄로 떠듬떠듬 써내려 엮어낸 첫 번째 책 이후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사이 조금씩 생각도 정돈되고 읽히는 문장도 늘어나, 다시 문단으로 커지고 책으로 엮이는 설렘을 세 번 더 겪을 수 있었으니 늦깎이 글쓴이는 큰 행운을 얻은 듯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들께서 보아주시는 이 칼럼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상을 돌아보고 새로운 발견을 정리해 알리는 것을 일정한 주기로 해 나가며, 손이 굳지 않도록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꾸준히 쓰도록 했던 어릴 적 일기 숙제까지도 그토록 귀찮았지만 나름대로 효용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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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라는 이름의 묵직한 칭호
한 분야를 묵묵히 지켜온 이들
우리 모두 무언가 만들어가길
」
이번 책을 낸 후 확연히 다른 점은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꾸준히 몇 년마다 새로운 책으로 만났지만 조직의 직함으로 불리었을 뿐 작가라는 타이틀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책이 귀하던 어린 시절, 소년소녀 문학전집으로 읽기의 허기를 달랬던 저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은 감히 닿기 힘들었던 칭호였습니다. 전집의 지은이 부분에 적혀 있거나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글토막의 머리 부분에서나 보았던 이름들을 떠올려 보자면, 작가라는 이름으로 아주 넓고 느슨한 테두리에서나마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과 무게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지난주에는 이슬아 작가가 제 책의 온라인 북 콘서트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간신히 얻은 저와 20대부터 작가라는 이름을 확고히 해 독자적 팬덤을 보유한 선배 작가의 만남에 1000분이 넘는 독자들께서 응원과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세 권을 내는 동안 가만히 지켜보신 독자들이 쉽게 그 칭호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얻은 것 또한 이룬 것을 치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니 더 열심히 하라 독려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주장이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얻기까지의 여정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윤여정 선생님과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세계적 팬덤을 보유한 패션 디자이너 톰 브라운 선생님의 대담을 참관하였습니다. 개성 뚜렷한 고유함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 분의 만남은 의외로 수많은 공통점의 발견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본인이 한다면 자신의 스타일대로 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주장을 힘주어 말하며 서로를 공감했습니다.
무엇보다 윤여정 선생님이 본인을 예술가라 칭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말씀하신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고흐나 마네, 모네 같은 기념비적인 인물이나 예술가라 불리기에 합당하지 본인은 직인이나 장인(craftsman)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하신 것에는 겸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본다면 그 속에는 타인의 인정을 섣불리 먼저 상정하지 않는다는, 자기 일에 대한 고집스러운 자부심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하나씩 본인만의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함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이번 제 책 속의 문장이 대배우의 고백에서 실체적 유효성을 검증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해 나간다면 인정은 따라오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입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라우디아 골딘 박사의 연구는 성별 임금의 불균형에 대한 분석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각자가 만든 물건에 값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보낸 시간에 비례해서 임금이 산정되며, 조직은 ‘시간을 더 탐하는 직업(greedy job)’을 선호하기 때문에 성별 임금불균형이 더욱 심화됨을 지난 200년간의 데이터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이제 지능화와 초연결로 노동을 아닌 숙고를 파는 세상으로 바뀌며 우리는 이 불균형이 바로잡히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것을 팔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한자 그대로 ‘짓는 이’ 작가가 될 것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만들어 나가는 작가들의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작가이기에 각자의 작품에서 그 밀도와 완벽한 표현을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장인의 풍모를 기대합니다. 복잡한 물건을 알아서 척척 만들어 내는 거대한 기계 앞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레 깎은 연필을 쥐고 새벽 어스름의 고요한 책상 앞에서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메워가던 대문호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작품을 교환해 향유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근미래를 희망해 봅니다.
송길영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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