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미생의 신의

2023. 11. 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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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중국 춘추전국 시절 서주(西周) 노(魯)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청년이 살았다. 어느 날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데이트가 있었는데 장소는 다리 밑이었다. 그는 약속 시각이 되어 다리 밑에 나가 기다렸지만, 애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다리 밑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가 마침 장마철이어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맛비는 억수같이 쏟아져 미생이 있는 곳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려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미생은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교각을 잡고 버티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장마가 걷히고 물이 빠진 후에도 미생은 교각을 부둥켜안고 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우화의 필자인 장자(莊子)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살이에서의 신의의 중요함일 것이다.

신영웅전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신의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됐다. 기업의 윤리도 없고 정치하는 사람의 책임도 없다. 오로지 목전의 돈과 공천에만 연연할 뿐이다. 연전에 어느 운수회사에서 기사에게 연수하면서 교통사고가 날 경우에 불구자를 만드는 것보다는 아예 죽이는 것이 해결하기도 편하고 돈도 적게 든다고 설명했다는 말을 그 기사로부터 들으면서 나는 소름 끼치는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 요즘의 건설 회사들도 공사비를 다 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위자료로 해결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고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땅이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이 오로지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이 되기를 바랄 만큼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적어도 이 땅이 최소한의 믿음이 통하는 터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시멘트 대신 비닐을 넣고, 교각 공사에 철근 대신 스티로폼을 쓰고, 공사비의 40%를 하도급에서 착취하고, 거기에 다시 관청 문을 드나들 때마다 뜯기는 이 야만의 땅이 나는 싫다. 왜 미생의 사당이 일본에는 있는데, 중국에는 없는지도 궁금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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