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도둑으로 몰린 지독한 산책 중독자, 그가 퍼올린 책
[김병기 기자]
▲ 박호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강화도 굴암돈대를 거닐고 있다. |
ⓒ 김병기 |
'걷기 예찬'(프랑스 다비드 르 브르통 교수 저서)의 첫 문장이다. 걷는 즐거움에 대한 단순 에세이가 아니라 철학서인 이 책을 떠올린 건 지난 20일 박호성 서강대 명예교수를 만나려고 강화도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였다. 박 교수는 이날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강화도 버스터미널에 마중을 나왔다. '산보 중독자'로 불리는 박 교수는 최근 강화도에서의 10년 산책과 사색을 통해 퍼올린 정치사상서 '인간론'(도서출판 '범우')을 펴냈다.
서강대에서 정치외교학을 가르쳤고,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을 역임하다가 정년퇴직한 뒤 10년째 강화도에서 홀로살이를 해 온 박 교수.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인 그와 함께 이날 강화도에서 반나절 이상 머물면서 해변과 돈대 위를 거닐거나, 한적한 카페에 마주 앉아 강화도와 그의 마음자리를 산책했다.
[걷기 예찬] 대형마트도 산책하는 '산보 중독자'
"요즘도 산책을 많이 하시나요?"
그는 대답 대신 윗옷을 살짝 걷어 허리춤을 내보였다. 허리띠에 매달린 만보기가 2개였다.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도 강화도 곳곳에 개척한 산책로 위치와 특성에 대해 침이 마르게 설명했다. 산책을 즐긴다는 뜻이다. 가난했던 서베를린 유학 시절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족히 50년은 됐다. 그가 지독한 '산보 중독자'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 하늘에서 본 강화도 굴암돈대 |
ⓒ 김병기 |
이날 박 교수가 안내한 첫 산책 코스는 굴암돈대 오르는 길.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이곳 석양이 강화도에서는 최곱니다."
타원형의 돈대 위에 올라서니 석모도의 남쪽 끝자락과 강화군 장화리의 서쪽 끝자락이 끊어질 듯 이어져 있다. 돈대 남쪽과 북쪽은 드넓은 갯벌이다. 흡사 오메가 형태로 한쪽이 탁 트인 거대한 호수 같기도 했다. 굴암돈대 위에서 그윽하게 익고 있는 붉은 노을 속을 홀로 걷는 박 교수를 상상하니, 짜릿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수려한 자연 풍광 속에서 떠오르는 단상을 10년 동안 기록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컴퓨터 앞에 앉아 단상에 살과 뼈를 붙었다. 자신의 정치사상을 견고하게 세우고 덧칠하는 과정이었다. 그의 산책은 '걷기 예찬'의 첫 문장처럼 세계로 자신을 여는 사색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 박호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강화도 집 앞에 서 있다. |
ⓒ 김병기 |
[강화도 유배] 정년퇴직 후 '종신 자유 귀양살이' 택한 까닭
현재 박 교수의 거처는 강화군 내가면 '고려지'(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이층집이다. 이곳에 오기 전 1년 동안 머물던 곳은 강화도 북서쪽에 북한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 지역, 교동도다. 그는 교동초등학교에서 무보수 명예직으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한 대학교수로서는 특이한 이력이다.
"학생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면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게 제 소소한 꿈이었어요."
그럼 왜 강화도였을까? 부산 영도가 고향인 그는 항상 섬을 동경했다고 했다. 더 멀리 떨어진 곳도 검토했지만, 참여연대 창립을 주도했고, 학술단체협의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연구회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에게는 지금도 많은 인연의 끈들이 이어져 있다. 가끔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적절한 거리가 필요했단다.
나는 대체로 모험하듯 우격다짐으로 산보하는 편에 가까웠다. 산책이 탐험이 되기 일쑤였다. 그 덕분에, 매일 매일이 섬뜩하나 휘황한 여행길이 되곤 했다.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걸어보는 길도 무수히 발굴하였다.(중략) 세상에 본래부터 만들어진 길은 하나도 없다. 환희의 연속이었다. 회의에서 출발해 환희로 마감하는 것, 실로 이게 산보의 진미였던 것이다.('인간론' 12~13쪽 발췌)
산책과 함께 지독한 고독을 즐기기도 했던 박 교수는 "혼자서 꼴값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게 된다"면서 "혼자 지내면서 생기는 어려움도 있지만 저는 무한한 자유 같은 걸 얻었다"고 강조했다.
[유학과 귀국] 계급문제와 민족문제... '인간'에 이르는 길
왜 '인간론'이었을까? 이 질문이 끝나자 서베를린 유학 시절부터 그동안 배웠던 학문과 대학교수가 된 사연, 그가 쓴 저서의 내용 소개 등 긴 답변이 되돌아왔다. 이를 재구성해 요약하면 이렇다.
"서베를린 유학을 택한 까닭은 일자리 때문이었어요. 학비는 거의 들지 않지만 체류비가 필요했죠. 안 해 본 알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구라파는 입학하기는 쉬워도 졸업하기 힘든 곳이죠.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선택한 주제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였습니다. 독일의 노동운동 사례를 중심으로 했죠. 박사 논문은 독일에서 호평을 받아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그 책을 들고 한국에 들어오니 학생운동권 내에 'NL' 'PD' 논쟁이 한창이었어요. 한 출판사가 요청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냈는데, 운동권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계급론과 민족론을 전공한 교수들이 없었기에 대학 강단에 서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 책입니다.
'사회주의 정치사상',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과목 수강생들이 미어터졌습니다. 제 강의 첫 시간에는 의례 '학생이 아닌 분들은 나가달라'로 시작했습니다. 도강을 하거나 밀정 노릇을 하려고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 뒤 계급문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게 '평등론'(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수상), 본격적으로 인간문제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쓴 게 '휴머니즘론', 그 뒤 '공동체론'(한국출판문화상 수상)을 통해 더불어 잘사는 사회에 대한 방향을 정립하려고 했습니다."
▲ 강화도 굴암돈대 위를 산책하고 있는 박호성 서강대 명예교수 |
ⓒ 김병기 |
[인간론] 풍전등화가 아니라 '바람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
요즘은 1분 미만의 짧은 영상이 유행하고, 책보다는 짧은 인터넷 콘텐츠를 즐겨보는 시대다. 이런 콘텐츠들은 인스턴트식품처럼 가볍게 소비할 수 있기에 전파력이 뛰어나고, 대부분 쉽게 잊히기에 휘발성도 강하다. 하지만 최근 박 교수가 세상에 내놓은 '인간론'은 무려 720여 쪽에 달한다. 어려운 사상서를 쉽게 풀어쓰기 위해서였단다. 그래서 쉽게 읽힌다.
-책 두께만 보고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을 위해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해주신다면?
"인간을 '바람 앞에 등불'로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 책은 왜 인간이 '바람을 비추는 등불'인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1장 '인간 본성과 인연론'에서 인간 본성을 고독과 욕망으로 규정하고 인연론을 설명했는데, 요지는 무엇인지요?
"인간은 고독하고 유한한 존재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왔기에 결여된 상태였고, 생존해야 하니까 자연스레 욕망이 수반될 수밖에 없죠. 이런 본성을 채우려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맺음이 필요합니다. 이게 바로 인연의 시작입니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인', 즉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는데, 혼자 힘으로는 안 되죠. 물과 토양, 햇빛 등과 만나야 '연', 즉 열매를 맺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장에서 '행동적 니힐리즘'과 '불구하고의 철학'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삶은 허무합니다. 고독한 삶이기에 그렇고,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죠. 이에 맞서서 풍성한 삶을 만들려고 감행하는 무모한 도전, 이때 '행동적 니힐리즘'이 요구됩니다. 또 우리는 '무엇무엇 때문에 무엇을 못 했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행동적 니힐리즘의 밑바탕에는 '불구하고의 철학'이 내재돼 있습니다.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감행하는 역설적인 정신이 삶을 이어가는 동력이지요."
-3장에서는 '인연 사관'이라는 독특한 관점이 등장하는데요, 공동체 발전 과정을 인연사관에 따라 해석하신다면?
"고독과 욕망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항상 공포심을 달고 살아야 합니다. '인연', 즉 인간관계를 맺는 건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서였죠, 가족공동체가 생겨났고, 구성원들이 딴 열매와 사냥감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심은 종족공동체를 잉태했습니다. 국가공동체와 종교공동체 등도 모두 고독과 욕망, 공포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바 큽니다."
박 교수가 이 책의 말미에 적어놓은 국내외 '참고문헌'만 해도 400여 개에 달한다. 탈레스, 소크라테스 등 서양의 고대 철학자와 동양의 공자, 맹자에 이르기까지. 금강경 등 종교서적과 톨스토이, 루소, 박경리 소설 등도 적시됐다. 각종 철학서와 경제서적, 환경서적 등 인문학적 자료들을 총망라하면서 정치학과 경제학, 생태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박 교수는 그 결과물로 '인연 휴머니즘'을 설파했다. 왜 고독과 욕망 투성이인 인간에게 배려라는 삶의 기술이 필요한지, '네가 괴로우면 내가 행복하다'가 아니라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는 지속가능한 공존의 이치를 역설한다. 자연이 오염되면 인간도 오염될 수밖에 없는 인연의 끈을 학문적으로 규명했다.
이러한 지난한 집필 과정을 통해 발간된 '인간론'의 귀결점은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지막 장인 5장의 '인연 휴머니즘'을 통해 '인간적인 인간'을 정의한 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정치가 지향해야할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 전략으로 '3공주의'(공생, 공화, 공영)와 '3생정치론'(생산의 정치, 생명의 행정, 생활의 자치)을 제시한다. 박 교수는 이를 하나의 구호로 정리했다.
▲ 박호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펴낸 '인간론'(종합출판 '범우')의 표지 |
ⓒ 종합출판 범우 |
이날 긴 인터뷰를 마치고 박 교수의 단골식당인 김치찌개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짧지만 밤 산책을 했다. 자신이 직접 개척한 산책길 초입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도 잠깐 동안 그에 이끌려 산책길을 맛보았고, 만나자마자 달려간 곳도 굴암돈대 산책길이었다. 이날 처음 만났던 강화터미널로 배웅을 나온 박 교수는 버스가 시동을 걸자 손을 흔든 뒤 자신이 발견한 터미널 근처의 산책길 쪽으로, 그 어둠 속으로 표표히 사라졌다.
정글자본주의로 치닫는 세계, 남쪽은 자유롭게 억압당하고, 북쪽은 평등하게 굶주리는 한반도 상황, 기하급수적으로 수탈당하고 있는 자연... 박 교수는 이 책의 여는 글에 "(이런) 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으나, 항로는 바꿀 수 있지 않으랴 하는 우격다짐으로 인간론이라는 주제를 시굴했다"고 적었다. 강화도에 자신을 유폐시켰지만, "사색은 사라지고, 검색만 활개 치는"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셈이다.
강화도 '산보 중독자'의 나 홀로 산책은 세계를 향해 무한대로 열려있다.
②편 <"윤석열은 'F학점'... 한마디로 친일파다">(https://omn.kr/266vq)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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