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부른 교황들의 '엽기적인' 탐욕
[이준목 기자]
'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보다 고귀한 존재' 교황(敎皇, Papa 혹은 Summus Pontifex )은 전세계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가톨릭 신자의 최고 지도자이자, 바티칸의 선출직 군주를 의미하는 직위다. 약 2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중 하나이자, 오직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직책이다. 오늘날에도 교황은 세계의 분쟁을 봉합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재자로서 존엄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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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변천사
10월 3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3회에서는 '종교개혁을 부른 신의 대리인 교황의 탐욕'편을 통하여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종교개혁의 변천사를 조명했다. 임승휘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바티칸 시국(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은 가톨릭의 성지이자 교황청이 위치한 도시국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바티칸의 어원은 기독교가 도래하기도 훨씬 전인, 로마의 테베레 강 옆에 원주민이 살던 마을인 Vaitca(혹은 Vaticum)에서 유래했다. 바티칸이 가톨릭의 성지가 된 것은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이 곳에서 순교했고, 로마 주교가 이 곳에서 대를 이어 교황에 오르는데 합의했기 때문이다.
'콘클라베(Conclave)'는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 어원은 라틴어로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이며, 추기경들이 모여서 철저한 비밀회의를 통하여 교황을 선출한다. 새 교황이 선출되면 하연 연기를 피워올리며 'Habemus Papam(새 교황이 선출됐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초기의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 의하여 탄압받았고,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자 반석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녔다는 것이 가톨릭에서 설명하는 교황 제도의 시초다.
박해 속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키운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기독교를 공인해줬고, 39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아예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교황은 국가를 넘어 기독교를 신봉하는 세계를 총괄하는 종교 지도자로서 그 위상이 점점 높아지기에 이른다.
9세기 경에 이르러 교황의 권세와 영향력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한다. 황제와 귀족들은 앞장서서 기독교를 지원하는데 앞장서며 그 권위를 인정했다. 이를 이용하여 힘이 더욱 커진 기독교는 105대 교황인 니콜라오 1세에 이르러 "교황의 권위가 모든 교회와 국가 위에 있다"고 선언할만큼 막강한 위세를 가지게 됐다.
대표적으로 교황은 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유럽 각 나라의 왕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교황이 직접 집행해주는 대관식은 기독교 국가의 왕들에게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국왕들이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왕관을 받는 것은 신의 대리인으로부터 왕좌를 인정받음으로서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또한 교황은 이를 이용하여 대관식을 일부러 기피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파문(기독교인의 자격을 박탈하고 추방하는 것)을 선언하는 것으로 국왕을 압박할 수 있었다.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1077년 1월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카노사 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관용을 구한 사건이다.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교황과 대립하던 하인리히 4세는 힘겹게 교황을 직접 찾아가 추위 속에 누추한 옷과 맨발로 성문을 두들기며 파문 철회를 애걸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3일만에야 성문을 열고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철회해줬다. 이 사건은 교황의 권세가 세속의 지배자인 황제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교황의 세속적 권세에 대한 집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교황은 기독교의 공식 소유 영지인 교황령을 다스렸는데, 역대 교황중에는 이를 자신의 가문에 몰래 떼어주거나 임기가 끝나도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십자군 전쟁 시에는 참전한 영주와 기사들이 사망할시에 그 재산을 교회가 양도하거나, 전쟁 명목으로 인한 특별세금을 부과하여 대중을 착취하기도 했다. 부유한 귀족과 상인에서 평범한 서민까지 교회에 잘보여서 구원을 받기 위하여 '헌금'을 바치면서 자연히 교회와 교황은 막대한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중세시대의 교황은 군대를 동원하여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었고, 15세기에는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교황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의 전통에서 이어진 오늘날에 교황을 지키는 바티칸 근위대는 바티칸 시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14세기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에 의하여 유폐당했던 '아비뇽 유수'(1309-1378년) 사건이후 철옹성같던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약 70년 뒤에는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 사건으로 유럽 일대에 최대 3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또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으로 수많은 인구가 무기력하게 죽어나가면서, 기독교의 타락과 무능한 교황을 질타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교황의 권위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1418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하여 대립하던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됨으로 서방교회 대분열은 다행히 종식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미 교황의 권위와 영향력은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교회는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데 집착했고 이는 세속적인 교황들의 연이은 등장과 교회의 타락을 오히려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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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취임한 212대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상속법을 개정하여 성직자의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줄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 교황령 내에 매춘업을 허가하고 세금을 걷기도 했다. 그 뒤를 이은 인노첸시오 8세는 중세 유럽의 상업명문가인 메디치 가문과 결탁하여 그 후손들을 추기경에 기용했고, 마녀사냥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214대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전임자들조차 애교로 보일 만큼 '탐욕의 끝판왕'으로 불린다. 그는 뇌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의 자리에 올랐고, 사생활이 난잡하여 16명이나 되는 사생아와 수많은 정부들을 뒀다. 알렉산드르 6세와 사생아 자녀들은 각각 부녀와 남매끼리 근친상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추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한 알렉산드르 6세는 43살 연하의 유부녀인 줄리아 파르네세를 정부를 두었고, 그녀의 오빠는 추기경으로 발탁되어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3세가 된다. 바티칸에서 알렉산드르 6세가 다수의 매춘부와 손님들을 불러들여 옷을 모두 벗고 난잡하고 세속적인 파티를 벌였다는 '알밤 연회' 일화는, 다시 교황청과 기독교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상징한다. 알렉산드르 6세는 이미 재위 기간에도 세간에서 사기꾼, 악마 등으로 불리우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재위 1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1503년 취임한 율리오 2세는 '전쟁광 교황'으로 유명하다. 그의 이름도 로마 시대의 정복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비유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율리오 2세는 나름의 치적도 있었지만, 교황령을 넓히기 위하여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고 직접 참전도 하는 등 성직자보다는 군인이나 전사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권력가'로 타락한 교황들에 대한 대중의 실망감은 커졌다. 천재지변과 전쟁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유럽 중세 사회에서는 성경에 기반하여 세상의 파멸을 예언하는 종말론 사상이 유행하기도 했다.
1513년 취임한 217대 교황 레오 10세는 '사치의 끝판왕'이자 종교개혁을 촉발한 교황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후손이었던 레오 10세는 부임 직후부터 엄청난 사치로 교황청의 재정을 붕괴시켰고, 이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과 성유물을 매관매직하여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다.
급기야 레오 10세는 '면벌부'를 만들어 판매하며 돈으로 죄를 사면받아 천국을 살 수 있다는 해괴한 발상을 내놓기에 이른다. 당시 부자에서 가난한 사람들까리 면벌부를 구매하기 위하여 혈안이 됐고, 유럽 전역으로 면벌부가 확산되면서 교황청은 '구원의 상품화'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독일의 마틴 루터는 이러한 면벌부 판매와 교황청의 타락에 분노하며 '95개조 반박문'을 올려 강하게 비판한다. 루터는 '교황을 통한 회개가 아니라 직접 죄를 참회해야 용서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사람은 이미 죄가 사해진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면벌1부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교황은 자신의 권한이나 교회법에서 정한 벌 외에는 어떤 벌도 면제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며 교황의 무분별한 권력남용을 지적했다. 때마침 당시 인쇄술의 발전으로 루터의 반박문이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면벌부 판매와 교회의 타락에 의구심을 가진 이들이 진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루터는 레오 10세로부터 보복성 파문을 당했지만 루터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난 '신교'세력이 형성되고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또다른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예정설'을 주장하며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진다는 교리를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칼뱅의 교리는 현대 개신교 사상의 기반이 되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파의 교리는 이후 북유럽으로, 칼뱅파는 스코틀랜드와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으로 확산됐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가톨릭과 분리를 선언했다. 유럽의 국왕과 제후들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정치-경제적 영향력에 따라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활용했다.
하지만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신교와 구교와 나뉘면서, 16-7세기에 걸쳐 피가 피를 부르는 참혹한 유럽 종교전쟁(독일 농민전쟁, 프랑스 위그노 전쟁 등)으로 800여 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초래하는 불씨를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모여 신교(칼뱅파와 루터파)와 구교(가톨릭)을 아울러 종교의 자유를 모두 인정하기로 합의하면서, 비로소 현대로 이어지는 다양한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펜을 들어 글을 쓰라.'
종교개혁의 서막을 알린 루터의 어록이다. 10월 31일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종교개혁일이기도 하다. 종교는 인류를 화합시키고 구원으로 이끄는 길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왜곡되고 탈락한 종교는 인류의 역사를 선혈과 부패로 물들이기도 했다. 종교의 선한 영향력과 진정한 가치에 대하여, 역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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