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엄마를 돌본 딸의 고백 "어머니를 몰랐다"
[윤일희 기자]
미국 소설가 린 틸먼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무너진 엄마를 11년간 돌본 경험에 대해.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소명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썼다. 11년의 혼란과 무지와 절망과 갈등과 우울을.
누구나 처음이 있다. 처음은 모두 낯선 것이고 그렇기에 잘 할 수 없다. 그러다 반복하며 익숙해지고 잘하게 되지만 무너진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그렇지 않다. 점점 곤경에 빠진다. 린 틸먼(이하 린)도 그랬다. 내가 돌보고 있는 이 사람이 나를 키운 엄마인가 자꾸 반문하게 됐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린의 어머니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며 문제적 징후를 일으킨 건 정상뇌압수두증 때문이었다. 진단은 그랬지만 린은 진단에 회의적이었다.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해도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허다하다.
내 경우 어느 날 엄마가 턱을 떨기 시작해 밥을 먹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러 MRI를 찍었다. 의사가 파킨슨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장복해온 신경정신과 약을 의심했다. MRI 결과는 파킨슨이 아니었고 내가 의심했던 약을 줄이자 엄마의 턱 떨림이 호전되었다.
이런 식이다. 병원은 각종 검사로 기계적 대응을 우선한다. 린은 의사의 매너리즘에 대항해 엄마의 병증을 직접 조사해 다른 치료법과 전략 등을 제안하며 엄마를 돌봤다. 이는 의료 상식이 없는 '보호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어머니를 돌보다 -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린 틸먼(지은이), 방진이(옮긴이) |
ⓒ 돌베개 |
린에겐 두 자매가 있었다. 모두 어머니 돌봄에 각자의 역할을 했지만, 돌봄은 두부 모 자르듯 정확히 재단해 나눠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자매마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다르고 관계가 다르고 돌봄관도 다르다.
어머니는 한 사람이지만 자매마다 다른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다. 린은 어머니를 돌보며 자매들과 관계가 손상될까 봐 노심초사한다. '의식적으로 조심'하다 마침내 견해 차이가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불면을 겪는다.
내 경우, 언니가 있었고 어느 정도 돌봄을 나누었긴 했다. 언니는 엄마의 김치(물김치가 있어야 그나마 밥을 드셨다)를 비롯한 음식을 맡았고, 병원 케어나 각종 의료 절차 자주 들여다보기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일하는 언니에게 부담 지우는 게 딱해 혼자 해나갔지만 너무 고됐다.
인지가 무너진 엄마를 상대로 언니가 아무 소용 없는 옳고 그름을 따져 울분을 터뜨릴 때면 인내심이 바닥났다. 자매가 있지만 돌봄의 고달픔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종종 억울했고 매일 외로웠다.
린은 어머니에게 양가감정을 느꼈다. '6살 때부터 어머니가 싫었'지만 이를 상쇄하기 위해 엄마가 가졌던 관계의 정의로움(인종차별을 하지 않았거나 길고양이를 구조하거나 등)을 상기하곤 했다. 린의 어머니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느라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했다.
주입된 주부다움을 성실히 수행했지만 채워지지 않은 내면은 결국 세 딸 모두를 질투하게 만들었다. 린이 좋은 책을 쓰고 세간의 칭찬을 받아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의 재능과 성취를 칭찬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은 딸에게 딜레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딸은 어른의 눈으로 엄마를 평가한다. 말을 뱉어내든 아니든, 엄마는 딸에게 판단되어진다. 엄마는 내게 좋은 엄마이기도 나쁜 엄마이기도 했다. 나는 린처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엄마가 싫어졌고 엄마가 싫어지는 내가 싫었다. 어른이 된 나는 엄마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었다.
엄마는 평생 가부장의 대리자로 살며 딸과 아들을 심하게 차별했고, 종종 딸들을 때렸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이용했다. 가장 많이 맞고 이용당한 언니의 분노가 컸기에 사소한 복수를 당하는 것은 감내해야 했지만, 엄마는 늘 야단했고 언니는 늘 화를 냈다. 엄마는 내게 동조와 위로를 원했다. 나는 린처럼 했다.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
엄마가 몸져눕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제야 장기 요양을 신청하네, 간병인을 구하네, 허둥댈 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부 보조를 받기 전 우선 와병 상태인 엄마를 돌보기 위해 간병인을 구했다. 첫 간병인은 엄마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아니 왜 저러지, 간병인이 엄마를 돌볼 때면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후 요양보호사가 왔다. 훈련받은 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간병인도 싫고 요양보호사도 싫어했다. 당신 공간에 타인이 있는 것도, 그가 당신의 살림살이를 만지는 것도, 그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것도, 모두 싫고 힘들어했다. 시스템은 돌봄의 모든 것을 커버하지 못했다.
린은 엄마를 돌보는 11년간 여러 명의 도우미를 겪었다. 대부분 '유색인종' 이주 노동자였다. 이들은 좋은 사람이기도 이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상주 도우미이기에 가족처럼 지내야 했다. 린의 어머니와는 그랬지만 린의 자매들과는 그럴 수 없었다. 가족 같았지만 가족은 아닌 경계에서 린 자매들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양보와 타협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는 린 자매의 입장이고, 이주 노동자 도우미에겐 어느 땐 좋고 어느 땐 제멋대로인 고용인일 뿐이었다. 이 격차는 린을 늘 긴장시켰다. 도우미가 바뀌는 것은 어머니 돌봄에 결락이 생기는 것이고, 이는 누구보다 어머니에게 해로웠기 때문이다. 도우미와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글을 쓰고 일을 해나가야 했던 린에게 도우미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어머니가 간병인에게 더 많이 의지할수록 나는 더 행복해졌다. 더 많은 시간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일 린이 전적으로 돌봄을 수행해야 했다면,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냥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면 나는 24층에 있는 어머니 아파트의 여러 창문 중 하나에서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돌봄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겐 충격이겠지만, 나는 공감했다. 일상의 통제권을 잃고 태연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어머니를 몰랐다
린의 어머니는 11년 돌봄을 받다 98세에 영면했다. 영면에 이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느린 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어머니의 마지막 활동을 지켜보는 건 어떤 경험인지, 린은 침착하게 설명한다.
그의 모든 이야기에 공감했다. 의료의 부진과 무능, 외국인 노동자 도우미와 맺어야 하는 긴장된 관계와 그 부정의함, 자매간의 이견과 다툼이 남기는 손상, '충분히 좋은 엄마'가 아니어도 돌봐야 하는 책임감 등 린의 상황과 감정 곳곳에 내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린은 이 책을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쓰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위로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왔다. 어머니를 돌보며 겪은 양가감정의 솔직한 고백만큼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고아가 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말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언니는 엄마의 장례식에서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라고 말했는데, 린도 같은 말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공감된 문장은 이것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몰랐다." 나도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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