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영화 세계의 시작점, 이제야 알려진 이야기
[김형욱 기자]
▲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노란문> 포스터. |
ⓒ 넷플릭스 |
2020년 이후 한국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끝을 알 수 없는 불황기로 빠져들었지만, 직전에는 역사상 최고의 한때를 보낸다. 2019년은 '한국 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 2억 2000만 명을 넘으며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고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쓰는 믿기 힘든 쾌거를 이룩했다.
봉 감독은 <기생충>의 역사적인 성공 후 수없이 많은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군 제대 후 활동했다는 영화 동아리 '노란문 영화 연구소'(아래 '노란문')을 자주 언급했다. 3명이 창립 멤버이고 한때 30명도 넘었지만 3~4년간 짧게 유지되었다. 원서를 구해 번역하며 공부했다고. 봉 감독의 데뷔작은 1993년 <백색인>인데 노란문 활동 당시 만들었다. 그런데 그의 '진짜' 데뷔작이 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아래 <노란문>)가 봉준호의 진짜 데뷔작이 나왔을 시절을 세세하게 전한다. 말로만 지나가듯 들었던 '노란문'의 실체에도 자세히 접근한다. 봉준호와 친구들 또는 친구들과 봉준호는 그때 왜 함께 모여 무엇을 어떻게 하며 시절을 보냈을까. 봉 감독 영화 세계의 시작점일 텐데 이제야 자세히 알려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노란문의 태초에 세 명이 있었다
'노란문'의 시작에는 세 명이 있었다. 당시 동국대 대학원 재학(연세대 졸업) 중이었던 최종태, 그와 안면을 튼 연세대 재학생 이동훈, 그리고 이동훈의 과 선배 봉준호. 최종태가 대학원 생활에 실망해 방황하던 중 이동훈과 봉준호에게 영화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최종태가 그때 대학원을 휴학하고 모델 에이전시 사업을 하고자 서교동 경서빌딩 어딘가에 조그마한 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들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잭 시 엘리스의 <세계 영화사>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1990년대 초에는 영화 이론 서적이 그 둘밖에 없었다고. 최종태의 말에 따르면 봉준호가 <세계 영화사>를 필사했다고 하고 봉준호의 말에 따르면 그 두꺼운 책을 필사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이동훈의 말마따나 '라쇼몽의 용광로'다.
원래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최종태 감독을 제외하곤 이동훈이나 봉준호는 사회학과 출신으로 영화를 '제대로' 할 깜냥이나 요량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니 뭔가를 이룩하자는 포부 혹은 야망이 뒤따르진 않았을 테다. 그저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는 막연한 생각 앞에서 '영화나 한 번 파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지 않나 싶다.
▲ <노란문> 스틸컷 |
ⓒ 넷플릭스 |
'노란문'이 점점 커 가는 데서도 '영화나 한 번?' 하는 마음들은 절대적으로 크게 작용한다.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세 명이 어느새 서른 명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들은 소풍 가듯 모여 함께 영화를 보고 각자의 생각을 나눴다. 나름 분과를 나눠 영화 공부도 하며 지식을 함량했다. 최종태가 정식으로 '노란문 영화 연구소'를 설립하고 책자도 발간했다.
그런데 그들은, 즉 '노란문'은 당시 서울 각지에서 우후죽순 생겨 나고 있던 영화 모임 또는 단체들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장산곶매'가 프리미어리그, '청년'이 분데스리가라면 '노란문'은 조기축구회였다.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의 시기에 아주 작디작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노란문'에 모인 개개인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의 대학생과 그때의 대학생은 많이 달랐나 보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가 중요할 텐데 그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우선이었다. 1990년대 초라면 민주화운동의 막바지 또는 끝머리를 향했을 시기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젊음을 바쳤던 수많은 대학생이 허탈함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때 누군가는 회사를 가고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예술에 빠졌을 테다. 한편 '노란문'으로 온 이들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무엇을 할지 정해 보고자 했을 테다.
봉준호, 시작, 한국 영화 그리고 노란문
<노란문>의 셀링 포인트는 단연 '봉준호'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명성에 기댄다. 또한 그의 미공개 단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볼 수 있을 기회다. 봉준호 영화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지하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엿볼 수 있고, 뭔가를 찾아가는 고릴라(인형)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눈물이 핑 돌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표층적으로는 봉준호와 최종태 등이 속했던 '노란문'이라는 영화 연구소를 통해 돌아보는 1990년대 초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시작'이 되어 준 곳 말이다. 누구나에게 어딘가에는 존재할 그곳 말이다. 30년 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의미 있는 단체의 이야기라니 흥미롭다. 타깃층이 확실하다.
나아가 심층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결정적 순간이라 할 만한 1990년대의 격변을 보여준다. 내부적으로 그동안 억눌려 있던 '문화'를 향한 자유의 바람이 민주화 직후 다방면으로 다층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이른바 '예술영화' 붐이 일었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천명한 시대에 맞춰 외부에서도 바람이 불어왔다. 영화가 큰돈이 될 수 있다는, 즉 산업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직접적 사례였다. '노란문'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개인과 사회는 따로 또 같이, 서로 상관 없는 듯 긴밀한 듯 관계를 이어 나간다. '노란문'의 멤버들은 개인적이고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로 모였지만 사회 그리고 시대의 부름에 오래지 않아 흩어졌다. 나 그리고 우리 또한 지금 그렇게 정착하고 부유하다가 흩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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