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제사 문화의 소멸

2023. 11. 1.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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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두 쪽 나도 제사는 참석해라." 항간에 떠도는 재벌가 며느리의 행동수칙 제1조다.

재벌은 가족과 친척으로 구성된 집단이니 제사를 중시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열 명 중 여섯 명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한다.

제수 마련을 위한 돈 걱정, 음식 장만하는 고생, 제사 지내러 모인 일가친척을 상대하고 뒤치다꺼리하는 일, 모두 부담스럽고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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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하늘이 두 쪽 나도 제사는 참석해라.” 항간에 떠도는 재벌가 며느리의 행동수칙 제1조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원래 제사는 죽은 사람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행사다. 가족과 친척의 결속을 확인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제사의 본래 목적이다. 재벌은 가족과 친척으로 구성된 집단이니 제사를 중시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재벌가에서 1년에 몇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지는 모르겠다. 제대로 지내려면 1년 전부터 스케줄을 잡아야 할 것이다. 죽은 날에 지내는 기제, 명절에 지내는 차례, 철마다 지내는 시제, 무덤 앞에서 지내는 묘제, 이것만 해도 벌써 열 차례에 가깝다. 번거롭긴 하지만 재벌가는 창업한 조상 덕에 잘 사는 집안 아닌가. 이 정도는 참아줄 만하다. 하지만 조상 덕 못 본 사람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역이다. 이러니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명절 연휴에 해외여행 가고, 조상 덕이라곤 하나도 못 본 사람들이 음식상에 절하고 집에 와서 싸운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오는 것이다.

제사는 원래 신분제 사회의 특권이었다. 대단한 조상의 후손임을 증명해 신분을 과시하고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신분의 고하에 따라 제사 규모와 대상이 달랐다. 고조까지 제사 지내는 4대 봉사는 원래 소수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가 신분 상승 욕구가 분출하면서 너도나도 4대 봉사에 동참했다. 제수가 늘어나고 제사 횟수가 잦아진 것도 모두 신분 상승을 위한 경쟁의 산물이다.

대중은 상층 엘리트의 문화를 모방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문화에 내포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모방한다. 결국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양반 아닌 사람이 양반 흉내내는 법은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 자세한데, 제사야말로 ‘양반 코스프레’의 핵심이다. 한국인의 유난한 제사 집착은 아마도 양반의 DNA 때문이 아니라 양반이 되고 싶은 서민의 DNA 탓이리라.

예법 따위 알 리 없는 서민들이 갑자기 제사를 지내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근대 출판물에 으레 ‘제사 지내는 법’ 따위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 이유다. 집에서 보고 들은 것이 없어서 그렇다. 제사상 차리는 법조차 모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좌포우혜 따위의 지침이다. 전통 예법과는 무관하다. 제사 문화를 연구한 전문가들이 줄기차게 이야기해 왔다.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호화롭다는 점도 누누이 지적했다. 하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혼자 집에서 조용히 지내면 그만인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놓고 상다리 부러지게 ‘보란 듯이’ 차려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 완고한 태도가 극심한 혐오를 부채질한 결과, 제사 문화의 소멸을 앞당겼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현재 열 명 중 여섯 명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한다. 형식과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시대 변화 또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는 답변도 있다. 나름대로 줄인다고 줄인 끝에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이것도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이른바 명절 스트레스의 원흉도 제사다. 제수 마련을 위한 돈 걱정, 음식 장만하는 고생, 제사 지내러 모인 일가친척을 상대하고 뒤치다꺼리하는 일, 모두 부담스럽고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가족 간 결속을 확인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제사가 본질을 잃고 갈등과 분란의 소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와서 간소화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봤자 소용없다. 제사 문화의 남은 목숨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무엇이든 형식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고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장유승(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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