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1’의 정치, 탕평 정치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소설가 권여선의 단편 ‘봄밤’에 나오는 대화다. 포근한 제목과 달리 실제 분위기는 쌀랑한 가을밤이다. 가지만 앙상한 나목(裸木)과도 같은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더는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남자와 지독한 알코올중독에 빠진 여성이 서로 기대며 삶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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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요체는 이해관계 균형잡기
윤 대통령, 선조 윤증의 탕평 언급
‘이태원 추모식’ 참석 불발 아쉬워
」
앞의 대화는 여자가 남자에게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어주는 대목에 나온다. 『부활』에 혁명가 노보드보로프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지력이 뛰어난 반면 자만심이 굉장해 별 쓸모없는 인간이란 혹평을 받았다. 이지력을 분자, 자만심을 분모로 놓고 볼 때 분모가 분자보다 훨씬 컸기에, 즉 기준 1에 턱없이 모자랐기에 ‘하위 혁명가’로 분류됐다고 한다.
‘봄밤’의 남녀는 이 비유를 모든 이에게 적용해 본다. 분자에 좋은 점, 분모에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을 낼 수 있다. 장점이 많더라도 단점이 우세하면 그 값은 1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인물은 “우리는 어떨까, 1이 될까”라고 묻는다. 극도의 결핍 상태, 말하자면 분모만 커가는 상황에서 그 수치가 ‘0’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워한다.
기자도 자문해 봤다. 나는 1에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대부분도 비슷할 것이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이 아닌 이상 말이다. 톨스토이의 비유처럼 숫자 1은 균형과 중도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좋고 나쁨, 빛과 어둠, 실리와 명분, 보수와 진보 등 세상만사는 어느 한쪽으로만 굴러갈 수 없지 않은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정국 때문일까. 숫자 1을 여의도에 빗대봤다. 이를테면 분자로는 대화와 소통, 민생과 복리를, 그리고 분모로는 이념과 분열, 정쟁과 당리 등을 들 수 있겠다. 지난 27일 갤럽 여론조사(윤석열 대통령 직무 긍정평가 33%,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도 각각 35%, 32%)가 보여주듯 여든 야든 모두 0.3대에 그쳤다. 소리만 요란하고 알맹이는 없는 ‘빈 수레’ 정치가 확인됐다.
『부활』의 노보드보로프처럼 우리 정치판에는 자만심이 가득하다. 상대에 대한 겸양을 잊은 지 오래다. 여야 공히 도긴개긴이요, 오십보백보다. 특히 최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여권에 불이 난 형국이다. 혁신위를 만들고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며 결기를 보였다. 윤 대통령도 중동 방문 직후 박정희 대통령 서거 44주기 추도식에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 참석했고, 이어 영남 유림을 방문하며 보수 통합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르는 것 같다. “국민이 늘 옳다” “(내각에) 국민의 절규를 들어라”라고 재촉하던 윤 대통령의 29일 이태원 참사 1주기 시민 추모대회 참석은 결국 불발로 끝났다. 추모식을 둘러싼 정쟁은 이해하지만 국민의 슬픔과 함께하는 통 큰 리더십을 발휘할 순 없었을까. 통치의 요체는 이해관계 조정에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7일 안동 병산서원에서 파평 윤씨 10대조 종조부(할아버지의 남자 형제)인 윤증(1629~1714)의 탕평(蕩平) 철학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당선 직후에도 안동을 찾아 윤증의 협치 정신을 기리기도 했다.
유학자 윤증은 스승 송시열(1607~1689)을 비판하며 당색을 뛰어넘는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이념으로 굳어진 주자학에 맞서 실용 학문과 정치 개혁을 촉구했다. 길게 보면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도 이어진다. 평생 관직을 물리친 그의 장례 때 조문 인사가 23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탕평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한국사에서도 탕평이 제대도 실현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탕평의 뜻을 깎아내릴 순 없다. 윤 대통령이 선조가 일러준 ‘실(實)의 정신’에 힘쓴다면 그에 대한 긍정지수도 0.33에서 1 쪽으로 조금씩 오르지 않을까.
글 =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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