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섬들, 김환기 추상화의 점이 되다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편집자말>
[이광표 기자]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은 단연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의 그림이다.
그 흐름은 2000년대 중반 무렵 시작되었다. 2007년 미술품경매에서 '15-Ⅻ-72 #305 NewYork'이 10억1000만 원에, '항아리'가 12억5000만 원에, '꽃과 항아리'가 30억 5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2010년대 들어 김환기의 기세는 더욱 두드러졌다.
2015년 '19-Ⅶ-71 #209'가 47억 2000만 원으로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신기록을 작성하더니 계속 갈아치웠다. 2016년 '무제 27-Ⅶ-72 #228' 54억 원, 2016년 '12-Ⅴ-70 #172' 63억3000만 원, 2017년 '고요 5-Ⅳ-73 #310' 65억5000만 원, 2018년 '3-Ⅱ-72 #220' 85억3000만 원…. 경이적인 고공행진은 급기야 2019년 '우주 5-Ⅳ-71 #200' 132억 원(크리스티 홍콩경매)으로 이어졌다.
국내외 경매 통틀어 한국미술품 최고가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엄청난 가격에 팔린 작품들은 대부분 김환기가 뉴욕 시절(1969~1974)에 그린 '점 추상화'들이다. 그렇다면, 김환기에게 점은 무엇일까.
바다를 보며 미술을 꿈꾼 천석꾼 부잣집 아들
목포에서 차를 타고 신안의 안좌도로 들어간다. 압해도, 암태도, 팔금도를 지나면 안좌도 길목에 보라색 다리(신안제1교)가 나타난다. 안좌도 남쪽 끝자락에 퍼플섬인 반월도와 박지도가 있음을 미리 안내하는 것이리라.
▲ 김환기 고향인 안좌면 읍동리 일대의 푸른색 지붕들. 김환기 그림의 푸른 색조를 반영한 것이다. |
ⓒ 신안군 |
김환기는 1913년 안좌도의 읍동리에서 천석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읍동은 기좌도였다. 안좌도는 원래 안창도와 기좌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 두 섬 사이를 매립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고 이름은 안좌도로 바뀌었다.
김환기 집안은 1910년대에 이미 부농이었고 선박회사를 운영하면서 육지 운송업도 하고 있었다. 특히 안창도와 기좌도를 연결하는 연륙제방공사와 간척사업, 읍동저수지 축조 공사를 맡아 넓은 땅과 재력을 축적하게 되었다.
김환기는 안좌공립보통학교(안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상경해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1931년 일본 도쿄로 떠나 니시키시로(錦城)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20세의 김환기는 고향으로 잠시 돌아와 부모가 정해준 여성과 혼례를 치렀다. 강요에 의한 결혼은 만족스러울 수 없었고 오히려 미술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1933년 김환기는 아버지 몰래 도쿄로 건너가 닛폰(日本)대학 예술부에 입학했다. 서양미술을 공부하며 창작에 매진한 김환기는 1937년 귀국해 서울과 신안을 오가며 미술활동을 이어갔다. 1942년 김환기는 부인과 헤어지고 안좌도를 떠났다. 고향을 떠나면서 집을 팔았고 소작농들에게 자신의 논밭 모두를 분배해주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던 서당은 안좌초등학교 교사들의 사택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 생활을 하던 김환기는 엘리트 신여성 김향안(金鄕岸, 1916~2004)을 만나 1944년 재혼했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卞東琳)이었다. 변동림은 1936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과 결혼했지만 이상의 갑작스런 일본행과 죽음으로 혼자가 된 형편이었다. 변동림은 김환기와 결혼한 뒤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었다.
6·25 전쟁 이후 김환기는 서양미술의 본고장 프랑스를 꿈꾸기 시작했다. 아내 김향안은 그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었다. 김향안의 열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김환기는 파리에서 미술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파리 시절을 거쳐 뉴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점 추상화를 탄생시켰다.
신안 안좌도의 읍동리 955번지에는 김환기의 옛집이 있다. 읍동사거리에서 살짝 경사진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고택이 나온다. 현재 안채와 화실만 전해오는데 안채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전남 신안 안좌도의 김환기 고택. 1920년대 백두산 소나무로 지은 근대식 한옥이다. 현재는 수리 중이며 2023년 12월 공사가 마무리된다. |
ⓒ 신안군 |
고택의 대문 입구 석축에는 고인돌 같은 커다란 바위가 떡 하니 박혀있다. 그 모습이 거북을 닮았다고 거북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집마당 입구에 이렇게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김환기는 이 바위에 앉아 바다를 내다보며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 김환기 고택 옆 화실 내부.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이 그린 김환기풍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
ⓒ 이광표 |
푸른색 지붕으로 물든 김환기의 고향
고택 앞쪽 길 건너편에는 공터가 있고 거기 마을 주민들의 공간이 있다. 분재와 식물들을 가꾸는 비닐하우스다. 여기 들어서면 초입에 김환기 고택 사진과 자그마한 백자달항아리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 김환기 고택 앞 비닐하우스. 주민들은 이곳에 김환기 고택 사진, 김환기가 사랑했던 백자달항아리를 전시해놓았다. |
ⓒ 이광표 |
이 비닐하우스엔 문화관광해설사 임동수(林東洙)씨가 있다. 그는 김환기급의 멋진 패션과 구수하고 매력적인 입담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임씨 가이드의 핵심 포인트는 '고택 뒷길' 답사다. 안좌도에서 김환기 미술을 제대로 느끼려면 고택 뒷길로 올라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고택 옆의 야트막한 고샅길 오르막을 오르면 고즈넉한 돌담길이 나타난다. 이 돌담길에 서면 고택지붕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 안좌면 읍동리의 마을 표석. 김환기의 초기작 ‘론도’(1938)의 그림을 넣어 디자인했다. |
ⓒ 이광표 |
임씨에게 "김환기와 관련해 고택 외에 더 가볼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다채로운 정보를 줄줄이 알려준다. 김환기 그림을 활용한 마을 표석. 농협창고 외벽에 그려넣은 김환기 그림들, 새와 사슴 등 김환기 그림 속 동물을 형상화한 조형물…. 임씨의 설명을 잘 되새기며 김환기 그림이 들어있는 읍동리, 남강리, 마등리, 남향리, 향목리의 마을 표석을 찾아다녔다.
▲ 안좌여객터미널 인근 농협창고 외벽에 그려넣은 김환기 작품 |
ⓒ 이광표 |
안좌도여객터미널과 한 펜션 앞에 설치한 설치한 김환기 그림 속 사슴 모습의 조형물, 여객터미널 건물과 인근 농협창고에 그려넣은 김환기 작품들, 퍼플섬 가는 갈림길 한국전력 건물에 그려넣은 김환기 그림들. 안좌초등학교 바로 옆 읍동사거리의 작은 공원에는 김환기 그림에 등장하는 반(半)추상 새 모양의 조형물도 높게 세워져 있다.
국내 첫 플로팅 뮤지엄의 탄생
김환기 고택 옆의 고개를 넘어가면 신촌저수지가 나온다. 김환기 고택에서 승용차로 1~2분, 걸어서 5~10분 남짓. 신안군은 현재 이곳에 김환기 미술을 기념하기 위한 플로팅 뮤지엄(Floating Museum)을 건설 중이다.
▲ 김환기 고택 인근에 들어설 국내 첫 플로팅 뮤지엄의 조감도. 김환기를 기리는 미술관이다. |
ⓒ 신안군 |
▲ 플로팅 뮤지엄 공사의 현재 상황. |
ⓒ 이광표 |
김환기는 1962년 '고향의 봄'이란 글을 썼다.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을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백마력 똑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 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 …순하디 순한 마을 안산에는 아름드리 청송이 숨막히도록 총총히 들어차 있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김환기의 작품은 거래가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미학의 측면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의 그림에선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진다.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담겨 있다. 무수한 점은 인간이고 생명이고 별이고 우주다. 대단히 성찰적이고 지적이면서 무언가 짙은 그리움을 자아낸다.
▲ 오래된 팽나무들이 멋지게 늘어선 안좌도 대리마을의 우실. |
ⓒ 이광표 |
대리우실과 팽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신안 지역에서 우실은 울타리라는 뜻으로, 숲이나 돌담으로 되어 있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을 하면서 액운을 막아내는 상징적·종교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대리마을 우실은 팽나무 60여 그루가 300m 정도 길게 줄지어선 모습이다. 이 가운데 10그루는 수령 350여 년 된 보호수다. 대개 우실은 약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
오래된 팽나무들이 어깨동무하듯 줄 지어선 모습은 정겹고 아름답다. 김환기 추상화 속, 줄 지어선 점들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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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미술관, 2005.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 삼성문화재단, 1997. 《김환기》, 갤러리현대, 1999. 이태호, 〈발굴 김환기 가계〉, 《월간미술》 271, ㈜월간미술, 2007년 8월. 김현숙, 〈김환기 회고전: 40년 추상의 여정을 꿰다〉, 《월간미술》 463, ㈜월간미술,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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