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번 철솔질로 찾아낸 회화 언어… 세계가 반했다
작가가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을 봤다. 그런데 손에 쥔 것은 붓이 아니다. 구둣솔 모양의 철솔이다. 공사장 인부들이 녹을 닦아낼 때나 쓰는 철솔로, 목장갑을 낀 채 벅벅 종이를 문지른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한국화가 유근택(59)이다.
한지에 아교로 갠 물감을 칠해 물을 뿜는 분수, 나무가 비치는 호수 등 대상을 그리는 게 한국화가에 대한 통상의 이미지다. 그런데 그는 그림이 그려진 한지 위를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문지르고 긁어댄다. 힘이 드는지 가끔 가쁜 숨을 토해내기도 한다. 철솔이 지나가면 한지 표면 아래 납작하게 누워 잠자던 섬유질이 잡초처럼 부스스 일어나 놀라운 효과를 낸다. 유 작가가 명명한 ‘제3의 회화 언어’가 된다.
유 작가는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반영’(12월 3일까지)을 한다. 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은 2017년 ‘어떤 산책’ 이후 6년 만이다. 그 사이 사비나미술관 개인전(2021), 대구미술관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전(2022) 등 ‘미술관 작가’ 행보를 이어왔다.
오랜만에 갤러리현대에서 갖는 이번 전시에서는 ‘창문’, ‘거울’, ‘이사’ 연작을 통해 화장대에 오른 물건, 이사 가는 날 거실의 이삿짐, 새벽의 도시 풍경 등 일상을 소재로 ‘X세대 감수성’을 변주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일상적 소재에 관심을 둔 것은 1990년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부터였다. 그는 1988년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해 왔다. 19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유입과 함께 정치 이데올로기, 민족 등 거대 담론보다 일상과 개인에 눈길을 돌리는 움직임이 문학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일어났다. X세대라 일컬어지는 당시 젊은 층의 움직임에 한국화가인 그도 합류했다.
유근택은 한 번 더 변신했다. 일상성으로 접근하는 태도에서 멈추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론으로 확장한 것이다. 바로 이 철솔질이다. 이 시도를 한 것은 오십이 되던 2015년부터다. 2014년 OCI미술관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작가는 “너무 그림이 잘 그려졌다. 그게 싫었다. 남이 하지 않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라며 새로운 출구를 찾아 헤매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래, 한지의 물성을 바꿔보자.’
어느 날 이 생각이 떠올랐다. 기성품 한지는 두꺼워 3겹, 4겹이 보통이다. 작가는 그걸 주문해 두 장씩 붙여서 6겹, 8겹으로 만들었다. 그러곤 충분히 두꺼워진 한지 위에 드로잉과 채색을 한 뒤, 한지 전면을 물에 흠뻑 적시고는 철솔질을 한다. 그렇게 해서 한지의 섬유질이 올처럼 거칠게 올라오면 다시 채색을 하고 철솔질하기를 반복한다. 날카로운 철솔로 수십 번, 수백 번 문지르는 작업을 통해 작가는 한지의 매끄러운 표면을 해체했다. 표면 아래의 섬유질을 잡초처럼 끌어올리고 그 안에 숨은 색채와 풍경까지 끌어올린다.
한지는 대상을 그리는 종이, 즉 지지체일 뿐이다. 그래서 회화에서는 선과 색을 양대 조형언어라고 한다. 정주하지 않은 한국화가 유근택은 철솔질을 통해 한지 자체를 선과 색에 이은 제3의 언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지라는 한국화의 숙명적 재료가 지니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한지는 대상을 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작가의 신체적 행위가 기록되는 무대이자 스스로 회화적 언어가 된 것이다. 북북 그은 철솔질에 의해 일어난 한지의 섬유질은 부피를 만들고 서로 뭉치기도 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표현적 효과를 낸다.
사실 종이가 물감을 흡수하는 한국화에는 마티에르(질감)가 없다. 그래서 캔버스에 물감 덩어리를 덕지덕지 얹을 수 있는 유화에만 마티에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철솔질을 통해 한지에 새로운 마티에르를 부여한 유 작가는 “내 작품 속 마티에르는 한지의 성질을 변질시켜 만들어 낸 것이라 마치 황토벽에 그림을 그리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그의 회화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따스한 느낌이 감도는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오십.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가장 안정된 나이다. 하지만 관성대로 나가지 않고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새로운 혁신을 한 유근택표 한국화는 지금 세계에서도 통한다. 한국화인데도 유화처럼 마티에르가 있는 동양에서 온 회화의 특이한 매력에 반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지난 4월 벨기에의 갤러리를 통해 브뤼셀 아트페어에 나갔고 5월에는 프리즈 뉴욕 아트페어에 갤러리현대 판매 부스에 개인전 형식으로 나가 완판 기록을 세웠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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