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반항-열정... 모든 덕목 갖춘 리버 피닉스의 성장영화

고광일 2023. 10. 3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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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허공에의 질주> ... 리버 피닉스 30주기를 기념하며

[고광일 기자]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속도로와 야구. 미국의 두 가지 상징으로 <허공에의 질주>가 시작된다. 그런데 미국의 상징을 나타내는 방식이 특이하다. 광활한 풍경 사이로 쭉 뻗은 미국의 익숙한 고속도로 풍경이 아니라 전조등으로 겨우 밝힌 한치 앞의 어두운 아스팔트 도로만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안경을 쓴 소년은 '야구는 내 인생이야'라고 말하지만 변변찮은 장비와 유니폼도 없이 야구방망이만 들고 타석에 서서 시원하게 헛스윙 삼진아웃된다.

고속도로를 따르는 거창한 모험과 가슴 뛰는 도전이 아니라 한밤 중의 위태로운 방황. 1-2-3루를 거쳐 집(Home base)으로 돌아와야 점수가 나는 게임에서 출루조차 어려운 상황. 영화의 원제인 'Running on empty'의 뜻인 "역부족"을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장면들이다. 그렇다면 안경 쓴 소년 대니(리버 피닉스)는 왜 장비는 커녕 유니폼도 없이 야구를 하고 있었을까. 부모인 아서(주드 허쉬)와 애니(크리스틴 라티)가 처한 특별한 상황 탓이다.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그들은 1971년 네이팜탄 투하 반대를 위해 군사실험실을 폭파하다가 실수로 경비의 눈을 실명시켜 FBI에 쫓기는 생활을 시작한다. 무려 15년째 이어지고 있는 도피생활 탓에 가족들은 거의 6개월 마다 도시를 이동한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반전(反戰)운동과 환경보호, 소비자 권리에 관한 교육을 하고 노조를 만들지만 순간이다. 집도 없고 모험도 없이 그저 지하조직원들이 비밀리에 모금한 후원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새로운 이름의 철자를 확인하고 화장실에서 염색을 하고 컬러렌즈로 눈동자색깔을 바꾸는 게 이들의 진짜 일상이다.
그런 대니의 생활에 변화가 생긴다. 새로 전학간 학교의 음악선생님 필립스가 대니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 본다. 어머니 애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소리 나지 않는 연습용 건반으로만 혼자 키워온 피아노 실력이 '줄리어드 음대'급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필립스 선생님의 딸 로나(마샤 플림튼)와도 우연한 첫 만남을 계기로 사랑에 빠진다. 가족말고는 누구에게도 인정 받은적 없고, 어떤 사람과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던 대니는 혼란에 빠진다. 하나 뿐인 가족도 중요하지만 꿈과 사랑을 두고 이전처럼 부모님을 따라 훌쩍 떠나버릴 수도 없다.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부모의 열정과 헌신의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영화의 기둥은 성인의 목전에서 독립의 기로에 선 대니의 성장담이지만 다른 축인 아서와 애니의 이야기 덕분에 풍성해진다. 아서와 애니는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결국 죄없는 경비원을 실명시켰다는 깊은 죄책감을 안고 살고 있다. 빛나던 젊은 시절 받던 주변의 기대와 뜨거운 열정이 사그라드는 중년이자 사회의 주류질서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남은 유일한 성취이자 행복은 대니와 해리 두 아들 뿐이다. 게다가 자녀들을 위한다는 선한 의지가 꼭 선한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두 사람이 가장 확실히 알고 있기도 하다. 

감독인 시드니 루멧은 회고록이자 영화작법을 다룬 책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서 <허공에의 질주>의 핵심 메시지를 '부모의 열정과 헌신의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라고 말했다. 이들 부부의 고민은 앞으로 FBI의 추격을 뿌리치며 가족의 행복을 지켜내는 것이지만 현실의 고난에 머리채를 잡히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질주해야 하는 건 스크린 밖의 평범한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15년간 쏟아온 열정과 헌신의 대가를 누구에게 치르게 하느냐 고민하고 갈등하는 아서와 애니의 모습은 이 영화가 청소년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성장영화로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음악과 춤은 <허공에의 질주>의 또 다른 주제다. 필립스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대니는 질문을 하나 받는다. 베토벤과 마돈나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대니는 답한다. "베토벤 음악에 맞춰 춤 출 수는 없어요."

선생님이 설명한 이유는 베토벤의 음악에는 일정한 리듬과 템포가 없기 때문이다. 반 년에 한번씩 거취를 이동하는 것 말고는 삶의 리듬과 템포를 놓치고 혼자 연습용 건반을 두드리며 살아온 대니에게 자기 방을 밥 말리의 포스터로 꾸며놓은 로나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나를 초대한 애니의 생일파티에서 가족들은 록뮤지션 제임스 테일러의 명곡 'Fire and Rain'을 다함께 따라부르며 춤을 춘다.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가서 세상을 바꿔, 우리는 노력했어

그러나 뭐라해도 <허공에의 질주>의 주인공은 대니다. 대니는 성장영화의 주인공이 가졌으면 하는 모든 덕목을 지녔다. 불안감, 사랑스러움, 반항기, 열정, 재능. 그리고 압도적인 매력. 이 모든 덕목은 대니를 연기한 리버 피닉스의 몫이기도 하다. 히피인 부모님 때문에 '신의 아이들(The Children of God)'이라는 사교조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연히 방송관계자에게 캐스팅이 되기 전까지 본인의 재능을 살린 길거리 공연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했던 실제 삶이 영화에 녹아있다.

삶이 영화에 녹아있다는 말을 보여주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화의 각본가는 배우로 활동 중인 질렌할 남매의 어머니인 나오미 포너다. 대니와 로나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원래 각본은 대니가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을 치다가 로나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채고 재즈로 바꾸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리버는 이 각본을 보고 꾸민 연기로 느껴지고 어떻게 자신의 캐릭터를 위태롭게 만드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결국 영화에서는 재즈 대신 베토벤의 음악을 끝까지 연주한다. 당시 리버는 17살이었고 나오미 포너의 나이는 리버보다 2배 이상 많았다.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의 후반부에서 대니는 처음으로 사랑을 주고 받는 로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가족은 흩어지고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 자기들이 떠나면 슬퍼해 할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들이 인생에 있다는 점. 아서와 애니 또한 열정과 헌신의 대가는 아이들이 아니라 본인들이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한다.

<허공에의 질주>는 리버 피닉스의 다른 영화들처럼 울듯말듯한 표정과 함께 끝나지만 한 가지만은 다르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아서는 대니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가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한다. 자기와 애니는 노력했다며. 트럭을 탄 가족들은 마치 홈베이스를 돌듯 대니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또 다른 고속도로로 향한다. 화면에서는 제임스 테일러의 Fire and Rain가 다시 흘러 나온다. 이제 리듬에 맞춰 우리가 춤출 차례다.

Won't you look down upon me, Jesus
나를 내려다봐주세요 신이시여
You've got to help me make a stand
내가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You've just got to see me through another day
또 하루를 견뎌내는 저를 봐주세요
My body's aching and my time is at hand
내 몸은 욱신거리고 시간이 촉박해요
And I won't make it any other way
다른 방법으론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Well, I've seen fire and I've seen rain
난 불을 겪었고 비를 겪었어
I've seen sunny days that I thought would never end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맑은 날들도 있었고
I've seen lonely times when I could not find a friend
친구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외로운 날들도 있었어
But I always thought that I'd see you again
그래도 널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었어

James Taylor - Fire and Rain 中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영화 <허공에의 질주>
ⓒ 영화 <허공에의 질주>
 
추신. 1968년 테일러가 헤로인 중독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을 당시 작곡된 것으로, 그가 겪은 미국 정신병원에서의 경험과 한 친구의 자살을 기록하고 있다. (...) 이 음반 제작을 맡은 피터 애셔가 28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만약에 이 곡의 독특한 점을 꼽으라 한다거나 특출난 부분을 딱 집어 말하라면 좀 애를 먹을 것 같네요. 그건 전체가 하나를 이루어서 그런 겁니다."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 2013, 로버트 다이머리, 토니 비스콘티, 이문희, Kat Lister,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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