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터' 그 감독, 말 못하는 가수의 사연을 말하다
[김성호 기자]
실제 모습과 대중적 인식에 큰 차이가 있는 이가 있다. 특출난 한 작품으로 기억되는, 소위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 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다소 결을 달리하는 경우, 대중에게 인식된 이미지와 작가의 실제모습이 대중들에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빚어내곤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하나로 꼽히는 이와이 슌지도 그런 경우라 하겠다. 한국에선 일본에서보다, 혹은 일본에서와는 좀 다른 이유로 명성이 높은 그다. 한국에서 슌지의 명성은 단 한 작품, <러브 레터>에 빚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키리에의 노래 포스터 |
ⓒ 이화배컴퍼니 |
<러브 레터>로 기억되는 감독의 신작
<러브 레터>가 이토록 한국인에게 특별한 감상을 자아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1998년 한국과 일본이 오랜 국교단절을 끝내고 관계 정상화를 했다는 점이다. 1995년 작인 이 영화는 일본문화가 개방된 직후 한국에 상영돼 암암리에만 전해지던 일본문화에 대한 갈증을 단박에 풀어주었다. 오랜 갈증 뒤 들이켠 음료수 한 잔의 맛을 잊지 못하듯 그 시절 일본 문화의 인상이 대단한 감상을 남긴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아련한 첫사랑, 떠나간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여인의 지고지순한 마음 또한 당시 한국의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있는 것이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 구조부터 낯설지만 매력적인 배우, 영상미와 음악의 조화 또한 당시로선 한국에 비해 앞서 있던 일본영화의 수준을 느끼게 했다. 이와이 슌지가 단박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영화감독이 된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 키리에의 노래 스틸컷 |
ⓒ 이화배컴퍼니 |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아이나 디 엔드
신작 <키리에의 노래>를 두고도 이 같은 우려가 나온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주연을 맡은 이가 독특한 이미지의 연예인 아이나 디 엔드라는 점도 관심을 모았다. <러브 레터>를 생각하는 이는 슌지와 영 안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냐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본 이라면 너무나도 그다운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러브 레터>를 제외한 슌지의 작품세계가 확고하다는 뜻이며, 그 작품들이 여전히 <러브 레터> 만큼 관객에게 다가서는 데 실패해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아이나 디 엔드가 누구인가. 아이돌 그룹 BISH의 멤버로 안무에 강점을 가졌다고 알려진 이다. 가수니 만큼 노래 또한 알려져 있는데, 통상의 노래를 잘 하는 이와는 영 다른 인상이다. 얼핏 들으면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아니냐 하고 당혹하게 되는 심하게 갈라지는 소리인데, 그것이 또 꽤나 멋스러워서 음색을 좋아하는 이도 꽤나 되는 것이다. 외모 또한 아무리 보아도 미인이라 하기는 어려운데 당당한 분위기가 독특하다 못해 기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소통보다는 자기만의 짙고 진한 분위기를 내는데 집중하는 슌지의 근래 영화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배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키리에의 노래 스틸컷 |
ⓒ 이화배컴퍼니 |
말 못하는 소녀의 노랫소리
말은 못해도 노래는 하는 키리에는 거리에서 노숙하다시피 하며 노래를 한다. 잇코가 노래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를 돌보며 사정이 조금씩 나아진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들 사이에 자리한 사연과 아픔이 있음을 드러낸다. 명확한 성장드라마나 그 비슷한 무엇이 되지는 못하지만, 도시에서 청춘을 안고 방황하는 이들의 삶을 관객들 앞에 막연히 펼쳐내는 모습이 과거 슌지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러브 레터>나 < 4월 이야기 >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 말이다.
지진과 쓰나미가 남긴 상흔을 영화의 소재로 기꺼이 품어내는 근래의 일본영화다. 슌지 또한 그 경향을 이어받아 재해가 남긴 상처가 일본의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내비친다. 한때 자폐에 든 사람처럼 분위기를 자아낼 뿐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던 슌지의 영화다.
▲ 키리에의 노래 스틸컷 |
ⓒ 이화배컴퍼니 |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다가서는 이야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운 이들은 온통 이 영화를 성토하기 바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거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냐거나, 그밖에 극만 보아서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과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이다. 슌지의 영화를 보고 나면 늘상 겪게 되는 것이지만, 나는 이들이 슌지의 영화에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는 전보다 훨씬 나아진 자세로 적어도 세상 앞에 노래하는 인물을 드디어 세워낸 것이다. 자신의 세상으로 숨지 않고, 프로가 되겠다 나아가진 않더라도 무대 위엔 기꺼이 오르는 이, 그 정도만으로도 나는 슌지의 영화를 이제 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러브 레터>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물러나 있는 세계를 집요하게 찍어온 감독이다. <키리에의 노래> 정도라면 이와이 슌지라는 감독을 제대로 소개하는 영화로 그래도 추천해볼 수는 있겠다고 나는 그렇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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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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