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동공연기'까지... 안젤리나 졸리여서 가능했다
[양형석 기자]
199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의 메카 충무로에서는 '한국영화는 박중훈이 나오는 영화와 박중훈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된다'는 말이 있었다. 물론 박중훈이 정말로 그 당시 극장에 개봉했던 한국영화의 절반에 출연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박중훈이라는 배우가 한국영화에 미치는 비중과 영향이 절대적으로 높았고 영화팬들이나 언론에서는 그것을 빗대는 우스갯소리로 이 같은 표현을 종종 사용하곤 했다.
비슷한 의미로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안젤리나 졸리가 여성배우들 중 단연 돋보이는 활동을 했다. 2000년 <처음 만나는 자유>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할 때만 해도 '연기파'에 가까웠던 안젤리나 졸리는 라라 크로포트를 연기했던 <툼레이더>를 시작으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대중지향적인 배우로 변신했다. 실제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애니메이션 더빙 두 편을 포함해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무려 18편이나 됐을 정도.
▲ <솔트>는 국내에서도 292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
여성 스파이 영화가 주는 색다른 매력
< 007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본> 시리즈로 대표되는 스파이 영화는 남자배우가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무래도 고난도의 거친 액션연기가 동반되는 스파이 영화 장르의 특성상 남자배우를 주인공으로 시나리오가 쓰여지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스파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실제로 2010년대 이후에는 여성 스파이가 나오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2017년에 개봉한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아토믹 블론드>는 안소니 존스턴과 샘 하트의 그래픽 노블 <가장 추운 도시>를 원작으로 한 스파이 영화로 <존 윅>과 <데드풀2>를 만들었던 데이비드 리치 감독이 연출했다. 촬영 전 두 달간 스턴트 및 무술지도를 받았던 샤를리즈 테론의 몸을 사라지 않는 액션 연기가 일품이었던 <아토믹 블론드>는 3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제니퍼 로렌스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헝거게임> 4부작 중 세 편을 연출했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이 제니퍼 로렌스와 다시 만나 2018년에 선보였던 <레드 스패로> 역시 동명소설 원작의 첩보스릴러 영화다. 부상으로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된 발레리나가 스파이를 양성하는 비밀정보기관에서 스파이로 길러져 임무에 투입되는 영화 <레드 스패로>는 화려한 액션보다 인물의 심리묘사에 집중했던 작품이다.
<레옹>과 <제5원소>로 유명한 뤽 베송 감독은 2019년 파리의 톱모델로 위장한 킬러가 자신에게 닥친 위협을 제거해 나가는 첩보 액션영화 <안나>를 선보였다. 뤽 베송 감독은 러시아 출신 모델 사샤 루스를 주인공 안나 역에 캐스팅했고 올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에서 열연을 펼친 킬리언 머피가 안나를 감시하는 CIA요원을 연기했다. 하지만 <안나>는 개봉 당시 화제에 비해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 8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하트 오브 스톤>은 <원더우먼>으로 유명한 갤 가돗이 주연과 제작에 참여한 첩보 액션영화다. <하트 오브 스톤>은 특수요원 레이첼 스톤이 가장 귀중하고 파괴적인 기술 '하트'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영화로 1억 9300만 시간의 누적시청시간을 기록했다(넷플릭스 TOP10 집계 기준). 다만 <하트 오브 스톤>은 액션영화로서 볼거리는 풍부하지만 첩보영화로는 아쉬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에블린 솔트는 평범한 사무실 집기들로 무기를 만들 정도로 뛰어난 요원이다.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
<솔트>는 여느 첩보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남자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실제로 톰 크루즈가 유력한 주인공 후보로 낙점됐다(당시 주인공 이름은 '에드윈 솔트'였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준비하던 톰 크루즈는 <솔트>가 <미션 임파서블>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출연을 최종적으로 고사했다. 결국 첩보물에 관심이 많던 안젤리나 졸리가 <솔트>에 출연하게 되면서 주인공의 성별이 여성으로 바뀌었다.
<솔트>는 정보를 주겠다며 미국으로 전향한 러시아 망명자에 의해 러시아의 첩자로 의심을 받은 CIA요원 에블린 솔트(안젤리나 졸리 분)가 자신과 남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는 첩보 액션영화다. 일부 첩보 스릴러 영화처럼 관객들과의 어려운 두뇌싸움에 신경쓰기 보다는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를 앞세운 영화 <솔트>는 1억 1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2억 9300만 달러의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솔트>는 '첩보'보다는 '액션'에 중점을 두고 있는 영화인 만큼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거미독으로 러시아 대통령을 마비시켜 며칠 동안 죽음을 위장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백악관 벙커장면도 마찬가지. 주인공의 활약과 영화의 반전을 위해 미국 대통령과 경호원들이 스파이 한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등 벙커의 방어체계와 보안이 너무 허술하게 표현됐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와 이에 대한 평가를 떠나 에블린 솔트 역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는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툼레이더> 시리즈와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원티드> 등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액션연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리연기 역시 매우 훌륭했다. 특히 안젤리나 졸리는 사랑하는 남편이 동료라 생각했던 러시아 스파이들에 의해 익사 당하는 장면에서 매우 섬세한 '동공연기'를 선보였다.
<솔트>를 연출한 필립 노이스 감독은 어느덧 70대가 된 호주 출신의 노장 감독으로 1990년대 해리슨 포드 주연의 <페트리어트 게임>과 <긴급명령>, 덴젤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가 나온 <본 콜렉터> 등을 연출했다. <솔트> 이후에는 <더 기버: 기억전달자>와 <어보브 서스피션> 등을 만들었고 2021년에는 학교 내 총격테러사건을 소재로 한 나오미 왓츠 주연의 스릴러 영화 <패닉 런>을 연출했다.
▲ 솔트의 CIA동료였던 윈터(오른쪽)와 피바디는 영화 후반 전혀 다른 행동으로 관객들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
흔히 스릴러나 액션 장르의 영화에서는 가깝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최종빌런'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솔트>에서도 CIA 내에서 솔트와 가장 가깝게 지낸 동료요원 테드 윈터가 영화 후반부 백악관 벙커에서 솔트의 러시아 스파이 양성소 1년 선배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벙커에서 미 대통령을 살해하고 핵무기를 발사하려던 윈터는 솔트에 의해 음모가 저지 당하고 솔트를 살해하려다 오히려 솔트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솔트>에서 이중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린 윈터 요원을 연기한 배우 리브 슈라이버는 배우와 감독, 작가, 제작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스크림> 시리즈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슈라이버는 국내 관객들에게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울버린의 형 빅터 크리드를 연기했던 배우로 유명하다. 2018년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는 빌런 킹핀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윈터 요원이 동료인 줄 알았다가 배신을 하는 반전의 인물이었다면 치웨텔 에지오포가 연기한 윌리엄 피바디 요원은 시종일관 솔트를 의심하고 추격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솔트의 수갑을 풀어주며 탈출을 돕는다(하지만 피바디 요원의 도움에도 <솔트>는 2023년까지 속편이 제작되지 않고 있다). 에지오포는 2013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노예 12년>과 마블 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출연한 배우로 널리 알려졌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크러시 제작진 "이태원 참사 풀리지 않은 의문 많아, 분명한 건..."
- '가슴 풍만한 멍청이'로만 기억되기엔 너무도 대단한 가수
- 윤 대통령 이태원 추도 '기획예배' 의혹... 신도들 "정치가 교회 이용"
- 인요한의 '뚫린 입'에 국민의힘 '자중지란'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혁신의 현장
- 엄마가 끓여주던 '똑딱이 손난로', 요거 아시는 분 있을까요
- 댐 10개 더 지어 가뭄 해결? 환경부의 무책임한 계획
- '음주측정 거부' 지민규 충남도의원 사과했지만... "진정한 사과는 자진 사퇴"
- 함양·합천·구미는 1%도 안돼... '태양광'은 억울하다
- 해병대수사단 1광수대장 "1사단장 제외 지시, 외압으로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