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100년 vs 뽀로로 20년 [쿠키칼럼]
K애니, 대상 넓히고 장르 다각화해야
[쿠키칼럼-이희용]
#1. 1923년 10월 16일, 미국 시카고 출신의 22살 청년 월트 디즈니는 은행원이던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카툰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전 세계의 동심을 사로잡은 애니메이션 제국 ‘디즈니 컴퍼니’의 창세기다.
디즈니 컴퍼니의 출발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창립작 ‘앨리스와 만화왕국’을 1924년 3월 개봉했다가 제작비도 건지지 못했다. 1927년 유니버설 의뢰로 만든 ‘토끼 오즈월드’ 시리즈는 인기를 끌었으나 유니버설에 저작권을 빼앗겼다.
이 일을 계기로 월트는 다시는 하청업체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절치부심해 쓴 시나리오가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에서 착안한 ‘미친 비행기’였다.
그러나 미키 마우스의 첫 출연작 ‘미친 비행기’는 배급사의 거부로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두 번째 작품 ‘갤러핀 가우초’도 마찬가지였다.
디즈니는 그림에 소리를 입히는 승부수를 띄웠다.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는 미키 마우스의 세 번째 출연작이자 데뷔작이다.
1928년 11월 18일 뉴욕 콜로니극장에서 미키 마우스가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증기선을 모는 7분짜리 애니메이션이 극영화 ‘갱들의 전쟁’에 앞서 상영됐다.
디즈니는 도널드 덕, 구피 등 후속 캐릭터를 내놓는 한편 1937년 ‘백설공주’로 장편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캐릭터 산업과 테마파크(디즈니랜드)로도 발을 넓히고 방송사와 영화사를 잇따라 인수해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공룡으로 군림하고 있다.
#2. 대학 졸업 후 1991년 현대그룹 계열의 종합광고대행사 금강기획에 입사한 최종일은 자동차 광고를 담당하다가 30살 되던 1995년 신사업팀에서 애니메이션사업 기획안을 제출했다.
만화에 소질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도 없었지만, 해보고 싶었고 하면 될 것 같았다. 2년 뒤 내놓은 작품은 ‘녹색전차 해모수’. 최초의 국산 3D 만화영화로 일본에도 수출했으나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그해 말 IMF 금융위기를 맞아 모든 신규 사업이 중단됐다. 2001년에는 회사가 영국계 기업에 매각되고 팀은 공중분해됐다.
2001년 9월 사라진 부서의 빈 사무실에 ‘아이코닉스 엔터테인먼트’란 간판을 내걸고 직장 동료 5명과 애니메이션 기획과 시나리오 개발에 매달렸다. 만화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림은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남북한 합작 3D 애니메이션 ‘게으른 고양이 딩가’와 일본 애니메이션 ‘요리킹 조리킹’ 등의 사업을 대행한 데 이어 2003년 6월 6일 ‘수호요정 미셸’을 KBS 2TV에서 선보였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중국에서 방영됐고 미국으로도 DVD가 수출됐다. 그러나 아이들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적자를 면치 못해 창립작이 폐업작이 될 뻔했다.
아이코닉스는 과녁을 유아로 낮췄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거의 모든 연령층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나마 유아용은 드물었다. 경쟁 상대인 미국과 유럽의 콘텐츠는 교육적 메시지가 강해 재미가 덜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오콘과 캐릭터를 개발하며 그동안 애니메이션에 잘 나오지 않던 동물들을 골랐다. 주인공 펭귄(뽀로로)에다가 북극곰(포비)·사막여우(에디)·비버(루피)·벌새(해리)에 공룡(크롱)·로봇(로디)까지 등장시켰다.
타이틀롤 이름은 펭귄이니까 ‘P’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다가 “주말만 되면 아이들이 평소 잘 만나지 못하던 아빠를 ‘쪼르르’ 쫓아다닌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어감이 귀여워 ‘뽀로로’로 정했다.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은 뽀로로의 인기는 외국에서 더 높았다. 지난 20년간 전 세계 180여 개국에 수출됐다. 프랑스에서는 평균 시청률 57%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캐릭터 상품도 동반 인기를 누렸다. 뽀로로 그림을 담은 팔도의 음료는 지난해만 7800만 병이 팔렸고, 2007년 이후 해외 누적 판매량은 7억 병에 이른다. 게임·완구류·문구류는 물론이고 신발·우산·자전거·비데·칫솔·감기약·전화기·글자체 등 다양한 분야에 뽀로로와 친구들의 캐릭터가 쓰이고 있다.
2009년에는 자회사 뽀로로파크를 설립해 고양시 일산, 서울 잠실, 제주 등 14곳에 놀이시설과 키즈카페를 꾸몄다. 중국 4곳을 비롯해 싱가포르, 사이판, 필리핀 세부, 태국 방콕에도 진출했다. 뽀로로가 창출하는 경제 효과는 연간 1조 원을 훌쩍 넘는다.
뽀로로는 지금도 아기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사랑을 받는다. 한바탕 울던 아이가 뽀로로를 보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는 광경을 누구나 한 번쯤 목격했을 것이다.
뽀통령(뽀로로+대통령), 뽀느님(뽀로로+하느님), 뽀수 그리스도(뽀로로+예수 그리스도), 뽀이돌(뽀로로+아이돌), 유딩왕 등의 별칭도 얻었다. 유아가 있는 가정의 평화에 기여했으니 노벨 평화상을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디즈니가 창사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이벤트를 펼치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뽀로로 탄생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특별 뮤지컬 ‘뽀로로 매직 싱어롱쇼’가 인기리에 열리고 있고, 오는 12월 1일에는 ‘뽀로로 극장판 슈퍼스타 대모험’이 개봉한다. EBS는 지난 어린이날과 추석 때 각각 20주년 특별영상 ‘출동! 리나왕국 대작전’과 특집 다큐멘터리 ‘뽀로로는 스무 살’을 방송했다.
우정사업본부는 올 5월 뽀로로 20주년 기념우표 80만 장을 발행하기도 했다.
뽀로로가 장수하다 보니 어릴 적 뽀로로를 보며 자랐던 친구들이 성인이 됐다. 이들은 뽀로로를 활용한 패러디 영상을 만드는가 하면 ‘잔망 루피’처럼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기도 한다.
뽀로로 이전에도 ‘로보트 태권V’를 필두로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 ‘아기공룡 둘리’ 등 K애니메이션의 전설적 스타들이 있었다. 뽀로로 이후에도 아이코닉스의 후속작 ‘꼬마버스 타요’를 비롯해 '로보카 폴리', ‘신비 아파트’, '캐치! 티니핑' 등이 명맥을 잇고 있다.
이제 막 20살 성인이 된 뽀로로가 95살 미키 마우스 못지않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아울러 뽀로로를 뛰어넘는 인기 캐릭터가 속속 등장해 미국과 일본이 양분하고 있는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 판도를 한국이 뒤흔들어주기를 기대한다.
턱도 없는 일이라고? 만화에서든 현실에서든 불가능한 것은 없다. 그 어떤 상상도 이뤄질 수 있다. K팝이 팝송을 누르고 삼성이 소니를 이겼듯이.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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