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태원 트라우마 소방관 어쩌나…서울시 지원예산 반토막
“한동안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잤다. 업무시간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고, 퇴근하고 나선 술에 의존해 끔찍한 기억을 지우고자 했다.”
서울의 한 소방서에 근무하는 4년차 소방관 A씨의 말이다. 그는 수백 곳의 현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구조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가득했다”고 했다. 특히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 구조지원을 나간 뒤엔 상태가 더 나빠졌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마시던 술을 거의 매일 찾게 됐고, 주량인 반병을 넘겨 폭음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깊은 우울감에 빠진 A씨는 지인과 동료들에게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 섞인 말을 자주 들었다. 그는 결국 소방서 내에 있는 심리상담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며 조금씩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지난해 기준, 소방공무원은 10명 중 1명 가까이가 A씨처럼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소방청이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위험군에 속하는 소방공무원의 비율은 지난 2020년 5.1%였지만, 지난해 8.1%까지 증가했다. 소방공무원의 자살 건수도 2020년 12건에서 지난해 21건으로 1.8배가 됐다.
정부는 이 같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소방공무원의 대면상담, 병원연계 등을 지원한다. 심리상담원이 소방서에 상주하며 상담과 심리 검사 등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특히 서울소방재난본부는 지난 5월 전국 최초로 애플리케이션(앱) ‘내 손 안에 상담센터’을 통한 비대면 상담도 시작했다. 서울시 소방공무원의 상담 건수는 지난 2019년 4391건에서 지난해 7061건으로 늘었고, 올해는 지난달까지 5261건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음해에도 이 같은 수준의 심리지원이 이뤄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서울시가 2024년 소방공무원 심리지원 예산을 올해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박강산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이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서울시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의 다음해 소방공무원 심리상담 지원사업 예산안은 4억6600만원으로 책정됐다. 올해는 8억1600만원이었지만, 다시 이태원 참사 이전인 2019~2022년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반면 중앙정부가 전국의 소방공무원 심리지원을 위해 책정한 예산은 올해와 다음해 모두 36억5800만원으로 동일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는 소방공무원들의 트라우마 증가세를 고려, 당초 2024년도 심리지원 관련 예산 14억원을 서울시에 요청했다. 찾아가는 상담소 담당 인력을 15명에서 27명으로 확대, 상담원 1인당 소방서 1곳을 맡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는 “국비와 시비 비율을 다시 동일하게 맞춰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했고, 전체 정부 예산 중 서울시 몫인 2억3300만원 만큼만 시 예산을 더해줬다. 총 예산이 거의 반토막 난 이유다.
서울시의 예산 삭감에 따라 소방 심리상담원 수는 급감할 예정이다. 서울소방재난본부는 계획했던 27명도, 올해와 같은 15명도 아닌 6명의 상담원만으로 다음해 소방 심리지원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3~4월에 사업을 시작하는 예년과 달리 2024년엔 1월부터 심리지원을 시작, 사업 기간도 더 길어질 예정이라 예산에 맞추려면 인력을 최대한 줄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총 283건의 상담이 이뤄진 앱을 통한 비대면 상담 역시 예산 문제로 운영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소방공무원노동조합 관계자는 “소방공무원은 PTSD를 가장 많이 겪는 공무원 직군 중 하나다. PTSD를 호소하는 소방관의 공상 처리도 제대로 안 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예산까지 삭감하는 건 PTSD 관리를 그냥 방치하겠다는 것”이라며 “현장구조 상황에서도 문제를 만들어 결과적으로 시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박 시의원은 “소방공무원이 트라우마 치료를 적기에 받을 수 있도록, 예산결산위원회 심사에서 반드시 올해 예산 수준 이상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찬규 기자 lee.cha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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