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이 담아낸 60년 동안의 게르하르트 리히터 #요즘전시

박지우 2023. 10. 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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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리히터만큼이나 회화라는 소재를 씨실과 날실 삼아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멈추지 않아 온 미술가가 또 있을까.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독일 현대미술 대표 화가 중 일인으로 손꼽히는 것은 물론, 작품가가 가장 비싼 생존작가이기도 하다. 리히터의 작품은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을 비롯한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으나 미술시장에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리며 고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작품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았다.

Gerhard Richter, Dresden 2017, Photo: David Pinzer, courtesy Gerhard Richter Archiv Dresden ⓒ Gerhard Richter 2023 (제공: Neue Nationalgalerie)

그렇기에 게르하르트 리히터 재단(Gerhard Richter Art Foundation)의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작품 100점을 영구 대여 소식은 유달리 반가웠다. 작가가 기획에 개입한 〈Gerhard Richter: 100 Works for Berlin〉가 지난 4월 처음 공개되어 2026년까지 전시된다.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하고 한국에서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설계로 유명한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주도로 2015~2020년 사이 리노베이션을 거쳐 건축 애호가에게도 관심을 받는 곳이다. 지상 단층 사면 전체가 유리로 된 건축구조로 얼핏 작품을 걸어야 하는 미술관의 역할에 맞지 않아 보이지만, 지하 공간에 야외 정원과 이어지는 대규모 전시실을 품고 있다.

Gerhard Richter, Uncle Rudi(루디 삼촌), 1965/2000, Photography, 87 x 50 cm, Edition 111, ⓒ Gerhard Richter 2023 (제공: Neue Nationalgalerie)
Gerhard Richter, Tante Marianne (마리안느 이모), 1965/2019, Photography version, 100 x 115 cm, ⓒ Gerhard Richter 2023 (제공: Neue Nationalgalerie)

60년에 걸친 예술 작업에서 리히터는 회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했다. 드레스덴 출신인 작가는 홀로코스트, 사회주의 정권을 거치며 필연적으로 예술이 어떤 가능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1961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리히터는 홀로코스트와 그 예술적 재현을 반복적인 주제로 삼아 꾸준히 그려왔다. 1965년에는 독일의 과거와 그의 가족사를 다룬 "마리안느 이모", "루디삼촌" 등의 그림이 뒤따랐는데, 실제 사진을 기반으로 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을 흐리게 함으로써 흐림(Blur) 효과를 주었는데, 이미지의 직접적인 묘사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기법이었다. 동시에 작가는 사진, 신문 스크랩, 스케치 같은 역사적, 때로는 사적인 시각적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강제 수용소 사진 등도 포함되었는데, 수십 년 동안 이 “아틀라스”를 자료로 사용하여 모티브를 얻었다.

Gerhard Richter, MV 133, 2011, Varnish on color photography, 10.1 x 15.1 cm, On loan from the Gerhard Richter Art Foundation (제공: Neue Nationalgalerie)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Gerhard Richter. 100 Works for Berlin〉 전시 설치 전경 ⓒ Gerhard Richter 2023 (Photo: David von Becker) (제공: Neue Nationalgalerie)

1976년부터 만들어온 추상화에서는 직접적 이미지 묘사를 거부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강렬한 색상의 겹을 덧대고, 물감을 스퀴지로 도포하고 혼합한 다음 다시 부분적으로 긁어냈다. 여러 겹의 색상이 맞물리고 아래쪽 표면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미지에 뚜렷하고 깊은 구조를 부여했다. 그 결과 작업 과정이 가시적으로 남아 있는 우연과 의식적인 결정 사이의 상호 작용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 탄생했다.

4900 Colours, 2007,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Gerhard Richter. 100 Works for Berlin〉 전시 설치 전경 ⓒ Gerhard Richter 2023 (Photo: David von Becker) (제공: Neue Nationalgalerie)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 Colours"(2007)도 비슷한 맥락을 파고든다. 국내에서도 "4900가지 색채"라는 전시로 소개된 바 있는 작품은 196개의 개별 정사각형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패널은 25개의 더 작은 정사각형 색채로세분화되어 있다. 이는 작가가 1966년 산업 페인트 컬러 차트에 매료되어 시작한 색상 탐구로 회귀한 결과물이다. 매끄러운 완벽함, 색상 재현의 정확성 및 변형 가능성을 지닌 정사각형은 감정적 고취나 숭고함, 표현성을 중시하던 당시 회화의 특징으로 기대하던 속성과 정반대였다. 작가는 그 후로도 1974년까지 다양하고 엄격한 색면 분포 실험을 이어갔으며, 2007년 쾰른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의뢰를 계기로 해당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Strip (930-3), 2013/2016,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Gerhard Richter. 100 Works for Berlin〉 전시 설치 전경 ⓒ Gerhard Richter 2023 (Photo: David von Becker) (제공: Neue Nationalgalerie)

이번 전시에 소개된 또 다른 기념비적인 작품 "Strip"(2013/16)은 1990년 작인 "추상 그림"(724-4)을 컴퓨터 제어 프로세스를 통해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누고 축을 미러링 하여 늘려 섹션을 재배치한 작품이다. 그 결과 무작위로 발견된 것처럼 보이는 줄무늬 모티프와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열한 모티프가 결합되어 탄생했다. "Strip"과 "4900 Colours"는 모두 매체의 경계를 논리적으로 탐색하고 결론 내린 추상 회화의 급진적인 진화라고 볼 수 있다.

절대 멈추지 않는 리히터의 실험은 추상과 구상, 사진과 회화 사이의 긴장감 너머로 지속해서 변주한다. 1986년 시작된 사진 인쇄물에 덧칠하며 전개해온 채색 사진 시리즈는 이미지를 지우는 동시에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부여한다. 지난 60여 년 동안 광범위하고도 다채로운 회화를 선보여온 리히터가 찾아 나선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현실에 던지는 진리에 가까운 여러 답변 속에서 각자 고유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구하는 것은 결국 관람객의 몫인지도 모른다.

「 Gerhard Richter: 100 Works for Berlin 」
기간 2023.4.1 - 2026

장소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PotsdamerStraße 50, 10785 Berl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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