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정부의 일방적 역사 평가가 국민 화합 해친다
전체주의 국가의 사상 통제 수단으로 변모
최근 이승만 국부 추대 위한 동상·기념관 건립 운동이
홍범도 동상 이전과 대비돼 오히려 국민 통합 해칠 우려
1455년 금속활자로 찍은 구텐베르크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 중세 암흑기의 유럽 교회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고가의 필사본 성경 구입은 그림의 떡이었다. 성경을 독점한 사제의 강론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마제국에서는 라틴어를 모르는 하층민과 게르만족 등 이교도를 교화시키는 데 예수나 마리아 모습이 담긴 성화상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395~1453년)에선 성상을 우상숭배라고 배척하는 이슬람교 영향으로 대대적인 성상 파괴 운동이 벌어진다. 성서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 끝에 로마 당국은 7차 공의회(787년)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은 성화를 통해 표현된 교리와 성인의 행적에 대한 공경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종교개혁 과정에서 칼뱅파의 대대적인 배척 운동으로 개신교에서 성상이 사라졌지만 가톨릭교회엔 아직도 예수와 성인(聖人)들의 성상이 건재하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 세워진 베드로 동상의 왼발등이 순례객들의 입맞춤 등으로 거의 닳아 없어진 것은 성상이 가톨릭교회의 바람과 달리 숭배와 기복신앙의 대상이 돼왔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상징물이 17세기 일본의 에도 막부 시절엔 종교 탄압에 이용되기도 했다. 막부는 가톨릭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나 마리아의 모습을 목판이나 금속판에 새긴 ‘밟는 그림’이란 뜻의 후미에(踏み繪)를 보급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남으려면 배교의 뜻으로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북한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조형물은 국가의 통치 이념을 주입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70년대 군사정권하의 남한 사회도 반공 사상 고취를 위해 동상이 동원했다. 대표적인 게 박정희 정권이 1968년 12월 울진·삼척 무장공비잔당에 살해된 이승복 어린이 동상을 전국의 국민학교 교정에 세운 일이다. 대운동장에서 거행된 추념식 행사 때마다 이승복 동상을 바라보며 ‘이승복의 노래’란 추모곡을 제창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통치 이념 전파 수단으로서 동상 등 기념물 건립 유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윤석열정부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모금 운동이 지난달 11일 시작되고 지난 7월엔 정전 70주년을 기념해 경북 칠곡 다부동에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나란히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국가보훈부 주도로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4 19혁명 주도 인사와 진보 정치인 등이 다수 참여해 좌우를 뛰어넘는 화해의 역사로 기록될 거라는 의미도 부여됐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선 이승만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한 홍범도 장군을 폄하하는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에서 최대 전과를 올린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육사 교정에 있는 그의 흉상 이전 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홍 장군은북한 공산정권 탄생은 커녕 그가 바라던 조국 광복이 이뤄지기도 전인 1943년 이국땅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는데도 일본의 후미에처럼 철 지난 사상 검증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건국의 기초를 쌓은 점을 부각하고 홍범도는 이를 훼손한 반국가 인사로 낙인찍어 이승만 국부 추대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게 정부의 의도로 읽힌다. 이를 위해서는 이승만의 과(過)를 감추고 공(功)을 드러내야 하고 홍범도는 거꾸로 공보다 과를 억지로 들춰내는 방식으로 대립적 모순을 극대화해야 한다. 실제로 육사 교장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홍범도 흉상이 육사 생도의 대적관을 흐리게 한다고 주장해 이를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승만 기념관과 동상들을 접하는 국민들의 기억회로 재부팅이 과제로 남는다. 사사오입 개헌, 4·3사건 당시 제주도민 무력 진압,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 그의 수많은 독재 이력을 말끔히 없어지길 기대하는 듯한데 이게 가능할까. 정부가 심각한 인지 부조화 증상에 걸렸다고밖에 달리 해석이 안 된다. 정부가 나서서 특정 인물의 업적만 찬양하고 다른 인물을 일방적으로 폄훼하는 건 역사를 망치고 국민 화합을 해치는 지름길이다. 진영 논리를 거둬들이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동상 끌어 내리기와 재건립 소동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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