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사건 피해자들과 공익 재단 설립… 진정한 용서·화해 전한다
<2부 당신이 희망 전도사> 등대장학회
공익에 대한 뚜렷한 소신 같은 건 없었다고 했다. 돈을 벌다가 기회가 되면 좋은 일도 좀 하겠다는 정도였다는게 박준영(48) 재심 전문 변호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다 2008년 맡은 첫 재심 사건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박 변호사는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을 다룬 영화 ‘재심’과 조만간 개봉하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다룬 영화 ‘소년들’의 실제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자신이 맡았던 재심 사건의 당사자들과 함께 공익 법인인 (재)등대장학회를 설립했다. 억울한 누명으로 어둠 속을 헤매던 이들과 함께 어려운 아이들의 등대가 되어주겠다는 취지에서다. 재단 설립에 앞장 선 박 변호사를 최근 그가 집사로 출석하고 있는 수원 보배로운교회(류철배 목사)에서 만났다.
박 변호사는 군 복무 시절, 선임이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걸 보고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니던 대학은 중간에 그만뒀다. 여러 차례 낙방을 거듭하다 2002년 마침내 합격했다. 2007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1년 뒤 만난 게 ‘수원 10대 소녀 살인 사건’이다. 당시 검찰과 경찰은 5명의 노숙 청소년과 2명의 지적장애인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박 변호사는 “범인으로 몰린 청소년들을 만나보니 강압적인 수사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는 판단이 섰다”고 했다. 사건 현장을 샅샅이 뒤지고 자료를 모았다. 사건을 맡은 지 5년 후인 2012년 6월, 대법원은 형사사건 최초로 재심을 결정했다. 이 사건 이후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지면서 약촌오거리 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등을 수임하게 됐다.
지난 달에는 박 변호사가 맡았던 재심 사건 피해자들이 모여 공익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법인의 이름은 등대장학회다. 재단 설립에 필요한 출연금은 재심 당사자들이 누명을 벗으며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과 손해배상금으로 마련했다.
박 변호사는 “경찰의 고문과 폭행으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1년 넘게 옥살이를 한 낙동강변살인사건의 경우 수감 기간이 길었던 만큼 보상액도 컸다”며 “그분들이 많은 돈을 내놓으셨다”고 밝혔다. 박 변호사는 “처음에는 제게 거액을 주신다기에 솔직히 그 돈을 다 받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동안 저를 통해 감동 받았다는 분들이 실망할 것 같았다”며 “주시겠다는 금액의 절반을 등대장학회 출연금으로 사용했다. 이 돈은 아이들의 꿈을 지원하는 일에 쓰일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억울하게 갇혔던 피해자들이 등대장학회의 이사장과 이사를 맡았다. 그 외에도 그들을 도왔던 방송국 피디와 작가, 언론사 기자 등이 이사로 참여했다. 박 변호사는 법인 감사를 맡았다. 박 변호사는 “지금까지 재심 사건을 맡으면서 모든 공적은 제가 다 취했다”며 “결과가 나오면 변호인만 주목받고 다른 분들은 조연처럼 묻히기도 했는데, 이번엔 그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감사라는 직책이 어떻게 돈이 모이고 쓰이는지 감시하는 사람”이라며 “제가 운영에 관여는 하지 않지만 법인에 모이는 돈이 잘못 쓰이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재심 사건으로 만난 피해자들이 보여준 희망과 긍정의 힘은 박 변호사의 가치관도 바꿔놓았다. 그는 “똑같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는 분노 속에 살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더라”며 “자신은 죄 안 짓고 교도소에 들어왔지만, 죄지은 사람을 달리 보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며 그들과 어울리고 희로애락을 주고받는 모습에 존경심이 들었다”고 전했다. 낙동강변살인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장동익 등대장학회 이사장을 언급한 박 변호사는 “그분은 종교의 힘으로 이해와 용서 관용 등 여러 긍정적인 생각 속에 수감 생활을 버티신 것 같다”며 “반드시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21년의 억울한 징역을 버틴 힘”이라고 꼽았다.
박 변호사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큰 힘”이라고 역설했다.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 해결의 열쇠가 됐던 진범의 용기 있는 자백도 피해자 유가족들의 관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 변호사는 “재심 사건에서 억울하게 옥살이하신 분이 고문 경찰을 용서해 보겠다고 하고, 피해자 유가족이 검사의 손을 잡아 줬다”며 “이런 모습들을 보며 왜 우리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악마화 하며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저 또한 정의감에 취해서, 혹은 유명해지고 싶어서 법정에서 검사들을 꾸짖고 깔아뭉갰는데 돌아보니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더라”며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영혼에 주가 주신 꺼지지 않는 빛이 있네. 우리 주님께 우릴 드릴 때 그 빛을 밝혀 주시리라. 이제 일어나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으로 나아가라.” 박 변호사가 사법연수원 신우회 활동 당시 불렀다는 복음성가 ‘빛을 들고 세상으로’의 가사다. 그는 “소외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가르침 아니겠느냐”며 “앞으로도 소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수원=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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