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연 1500명 의사 증원’ 즉각 못 박아야
지난봄 한림대성심병원 세미나에서 흐뭇한 인물들을 만났다. 40대 중반 두메산골 왕진의사, 간호사, 간병사. 이들 3인조는 춘천 화천의 산과 강을 가로질러 하루 200리 길을 오간다. 안개 자욱한 깡촌에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촌민들을 만나러. 대개는 고령자들이다. 평생 땅을 파며 살았던 그들은 이제 땅만 보고 산다. 골다공증, 관절염으로 허리를 펼 수 없다. 독거노인들이 다수다. 교통수단이 닿아도 탈 수 없는 그들은 통증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이 전국에 100만 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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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약분업 후 틀어막힌 의료개혁
지역편차, 필수의료 불균형 커져
수재집단과 노동집단 행위 유사
연간 2000명씩 늘려도 모자랄 판
」
도시의 선진 의료와 산골의 무의촌이 뒤섞인 나라가 한국이다. 어디냐고? 경북 내지, 강원도 홍천, 태백, 전라도 덕유산과 지리산 내지 산촌들. 섬도 마찬가지다. 큰 섬엔 보건소라도 있지만 작은 섬엔 통통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전국 586명에 불과한 공중보건의라도 만나면 행운이다. 사람 사는 섬 중 무의도(無醫島)가 58%다. 응급환자는? 대책이 없다.
필자는 의사 편이었다. 의사를 귀히 여겨야 서비스 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나는 도둑놈을 키웠다’- 의약분업을 촉발했던 유명 의대교수의 거친 자백에 맞서기도 했다. 필자가 쓴 『의사들도 할 말 있었다』(2001)라는 저서에 의사들이 환호했다.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의료계가 지역불평등과 필수의료를 정비해서 의료선진국을 만들 줄 알았다. 지난 20년간 그런 기대는 여지 없이 깨졌다. 그들은 고소득을 향해 질주하는 탐욕 집단이 됐다. 정부가, 국민이 그런 면허를 내줬다.
공공의료의 대명사인 영국과 스웨덴의 의사는 봉급생활자다. 의료시설 전부를 국가가 제공한다. 일반의(GP)가 무의촌에 가도 월급은 나온다. 모든 개원 비용을 개인이 책임지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혼합형이다. 국립병원을 제외하고 의료시설과 고용은 의사와 민간재단이 책임지고 의료비는 건강보험공단이 규제한다. 사적 투자에 공적 규제, 이런 나라가 없다. 투자비를 회수해야 하는 의사들의 사투가 여기서 비롯된다. 의대에 줄 선 이 나라의 수재들은 이런 엄혹한 현실을 모른다. 과잉투자자는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KTX 개통 이후 전국의 중형병원들이 망했다. 중환자들은 모조리 서울의 5대 병원에 흡수됐다. 그러니 탐욕 집단이라 하기도 궁색하지만, 구멍 난 의료현실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직업이기주의가 극치에 도달했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모두 슈바이처가 되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재집단이라면 사회적 책무에 실눈이라도 떴어야 옳았다. 지역간, 필수의료간 의료불평등 현황 지도(map)를 보고 어떤 고민을 했을까. 공익을 추구하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의료현안협의체가 가동되고는 있지만,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이익집단화된 의료단체들의 으름장을 넘지 못한다. 1999년 의료파업에서 익힌 경험은 아이언돔이 됐다. 의료개혁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파업경고장을 날리는 이 수재집단은 거대공장을 장악하고 광화문을 점거하는 노동집단과 무엇이 다른가? 거대노동조합이 법의 담벼락을 수시로 무너뜨리듯이 의사집단은 제도 철옹성을 쌓고 결사 사수했다. 20여 년이 지났다.
지난주,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의 의대증원 발표도 의료단체의 저항을 의식한 ‘간보기’ 정도에 그쳤다. 50명 미만 규모의 ‘미니 의대’와 국립대 의대 24곳의 정원을 먼저 증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일단 ‘500여 명 증원’ 패를 내놓고 눈치보기에 들어갔다. 여론에 비춰 이 정도면 의료단체도 수용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왜 정면돌파를 하지 않는가? 한국 의료의 현황지도는 심각하기 짝이 없다. 의사 부족 규모는 2030년에 1만8585명, 2040년에 3만8674명으로 급증한다(김진현 서울대 교수). 다른 연구보고서는 더욱 절박하다. 2035년에 2만7232명 부족이 예상된다고 했다(신영석 고려대 교수). 연간 2000명씩 늘려도 허덕댈 판이다. 그런데 우선 500명이라니.
의료정책이 정치에 종속되면 후진국을 면치 못한다. 의사 증원은 내년 4월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의사, 치과 포함 전체 의사규모는 약 16만명, 가족을 포함하면 40만 명 규모다. 지난 대선 때 정권교체가 발생한 마(魔)의 선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연간 1500명 증원을 정부 시행령으로 ‘즉각’ 발동할 것을 주장한다. 총선 판도에 따라 증원정책은 취소될지도 모른다. 정치권 용어로 올 11월에 ‘1500명 증원 대못’을 박아두고 다른 각종 절박한 쟁점들을 등급별로 해결해 나가기를 요청한다.
국립대병원 지원, 지방의대 신설, 지방근무 의무화, 필수의료 수가 조정 등등 수많은 쟁점들로 범벅이 되면 의료개혁은 헛공사다. 정상급 종합병원으로 발돋움한 한림대성심병원은 급증하는 인건비로 애를 먹는다. 국가지원은 제로다. 의료단체는 2006년부터 의대 정원을 연간 351명 줄였다. 고소득을 향한 시장 왜곡이었다. 17년간 누적된 잃어버린 의사 5967명은 배가된 국민 통증의 주범, 의사단체는 이 책임부터 져야 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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