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기업인이 회고한 ‘K스피릿’ [김선걸 칼럼]
K팝·K웹툰·K드라마 등 문화예술 분야는 물론 K푸드·K패션·K방산·K반도체·K조선까지 끝이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성과의 주역이 대부분 기업이라는 점이다. 하이브, 삼성전자, 농심, 한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속도와 효율을, ‘비빔밥’ 문화에서 ‘으쌰으쌰’ 협업의 DNA를 읽는다. 기업 경쟁력에 절대적인 요소를 한국인들은 갖고 있다. 그중 불굴의 ‘K기업가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현대·LG 등 굴지의 기업은 물론, 수많은 중견기업의 ‘기업가정신’ 또한 못지않았다. 며칠 전 들었던 노(老)기업인 스토리는 인상적이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국내 섬유업계의 맏형 격 기업인 얘기였다. 식사 자리에서 풀어놓은 얘기를 후배 기업인이 전해준 것이다.
1970년대 스웨덴의 의류 바이어 대행(Buying Agent)을 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대우실업에서 데님(청바지용 직물)을 납품받아 스웨덴에 보내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매번 들어오는 제품이 바이어 눈높이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갑’ 입장에서 불합격 판정을 내고 불량품은 돌려보내면 간단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물건을 돌려보내면 직물을 공급한 봉제 업체 등 하청업자 전부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반품 때마다 미싱을 돌리는 하청 업체 직원들이 눈에 밟혔다.
그는 결국 매번 불량 난 부분을 잘라 붙이게 하고 밤새 수선 작업을 해서 물량을 맞췄다고 한다. 심지어 작은 한 조각을 살리기 위해 바느질을 하거나 볼펜으로 색깔을 칠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험을 얘기하며 노기업인은 “기업가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하청 업체, 클라이언트와 회사 가족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 있던 후배 기업인들은 “팔순 가까운 분이 아직도 저런 각오를 다진다는 게 놀라웠다”고 전했다.
이 기업인은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이다. 본인에게 직접 확인했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포기 안 하고 끝까지 한 건 맞는데, 다 내가 먹고살려고 한 거지. 정말 힘든 시대였으니까.” 결국 이 정성이 오늘의 영원무역을 만들었을 것이다. 영원무역의 별명은 섬유업계의 ‘슈퍼 을(乙)’이다.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인데 공급하는 바이어들에게 갑(甲) 취급을 받을 정도로 귀한 몸이다. 클라이언트든 하청 업체든 끝까지 책임지는 정신이 일군 결과일 것이다.
성 회장 스토리가 마음에 더 와닿은 건 작금의 상황 때문이다. 미국의 기준금리 고공행진과 더불어 내년 세계 경제에 안개가 짙어지고 있다. 워런 버핏 말대로 ‘만유인력’ 같은 고금리가 자산 가치를 땅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소비는 위축되고 기업도 투자를 줄이고 경제는 쪼그라들 것이다. 발주 업체와 원청·하청 업체 간 긴장도 높아질 것이다. 각자도생 분위기에선 ‘을(乙)’을 쥐어짜고 직원을 잘라내는 쉬운 생존의 결정을 내리는 경영자도 많아질 거다.
경제학에 ‘외부성(Externality)’이라는 개념이 생각난다. 양봉업자 주변 과수원들은 꿀벌이 많아 꽃의 수분이 활발하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효과다. 그냥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의도치 않게 제3자에게 편익이나 비용을 주는 개념이다.
‘K기업가정신’에는 이런 외부성이 강하게 녹아 있다. 오래 간직하는 신뢰의 네트워크를 자산으로 삼고, 열심히 뛰어서 주변을 이롭게 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정신이 다시 필요한 시간이다. 그 정신이 한국 기업에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2호 (2023.11.01~2023.11.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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