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창업자의 손자, 회장 되고 가장 먼저 떠올랐다는 이곳

최대열 2023. 10. 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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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쿠라가이케기념관
도요타,20세기 초 섬유업으로 시작해 자동차
3대 아키오, 회장 취임 후 가장 먼저 언급
조부 키이치로 자동차업 진출 후 그룹 본거지

일본 나고야 시내에서 차로 40분 정도 가면 도요타시가 나온다. 세계 1위 자동차 기업 도요타의 본사와 공장이 있는 곳으로 지역명도 회사 이름에서 가져왔다. 본사에서 차로 15분가량 가면 쿠라가이케 기념관이 있다.

일본 최대 기업집단인 도요타나 오너 일가인 도요다 가문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다. 기념관은 1937년 자동차 사업을 시작해 누적 생산 1000만대를 기념해 1974년 세웠다. 기념관 인근에는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도요다 키이치로의 과거 저택과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영빈관이 같이 모여있다.

도요타 쿠라가이케 기념관에 있는 도요다 모델 AA 세단. 도요타가 가장 처음 만든 자동차로 당시에는 사명을 바꾸기 전이라 '도요다'라는 모델명이 붙었다.[사진제공:한국자동차기자협회]

여기에 회사 차원에서 큰 위기를 맞았던 2010년 미국 리콜 사태를 되짚어보며 도요다 아키오 현 회장이 이듬해 심었던 벚나무도 있는 곳이다. 아키오 현 회장은 미국 리콜 사태 직전인 2008년 회사가 어려워지자 사장에 취임, 그간 회사 경영 최일선에 있었다. 키이치로의 손자인 아키오가 사장으로 있다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곳이 도요타그룹의 정신이 깃든 쿠라가이케 일대였다고 한다.

도요타는 방적기·방직기 등을 만드는 섬유산업으로 시작한 회사다. 아키오 회장의 증조부인 도요다 사키치는 본인의 어머니가 어렵게 실을 짜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직기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사키치는 일본의 발명왕으로 불리는 인물로 훗날 자동직기를 고안했다.

도요타 쿠라가이케 기념관 전경[사진제공:한국토요타자동차]

사키치는 1896년 처음으로 동력 직기를 개발했다. 당시 유럽에서 들여온 기계가 있었지만 비싼 탓에 대중이 쓰긴 어려웠다. 나무를 활용해 기계를 만들면서 가격을 낮춰 범용성을 높였다. 일본의 공업화 과정에서 사키치를 높이 쳐주는 배경이다.

사키치와 아들 키이치로는 이후 G형 자동직기를 함께 만들었다. 기존에 개발한 자동직기가 실타래를 교체하는 데 걸렸던 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였다. 이 기기로 얻은 특허를 영국 회사에 양도, 훗날 자동차 사업을 하는 데 자양분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자동차 회사’로서 도요타를 시작한 건 사키치의 아들 키이치로다. 도쿄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키이치로는 처음 도요다 방직에 입사, 섬유산업을 먼저 겪었다. 이후 미국에 시찰을 하러 가서 자동차 산업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미국에선 막 자동차가 보급되던 시기였다. 일본에 돌아온 후 관동대지진이 나면서 키이치로는 확신했다. 당시 지진 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동차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도요타 산업기술기념관. 1936년 출시된 도요타 AA형 승용차 생산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자동차기자협회]

미국 회사였던 포드·제너럴모터스(GM)는 일본에 공장을 세워 트럭을 만들었다. 모든 부품을 미국에서 가져와 일본에서는 조립해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키이치로는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고 한다. 사장의 아들이자 회사 중역이 자동차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당시 자동직기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 가운데 뜻이 맞는 일부와 가욋일을 하면서 자동차 사업을 처음 시작했다.

지난 27일 찾은 쿠라가이케 기념관에서 미야코 요리야스 부관장은 "당시 증기차 기준 (일본은) 미국과는 30년 정도의 기술격차가 있었다"면서 "키이치로는 미국에서 차가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일본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고 다짐하면서 창업을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처음은 방직 회사 내부의 자동차 사업부서 격으로 시작했다. 17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한다. 키이치로가 중요하게 여긴 건 세 가지 정도였다고 한다. 매일 일을 개선하자, 현장에 직접 가서 답을 찾자, 고객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자였다. 이는 훗날 아키오 회장의 다짐과 연결된다. 아키오 회장은 사장 시절 "상대의 시선으로 일을 해야 한다, 일의 프로가 돼야 한다, 100년 전 큰 개혁의 시기를 겪은 만큼 지금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야코 요리야스 도요타 쿠라가이케 기념관 부관장이 자동직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자동차기자협회]
미야코 모리야스 부관장이 도요타 창업 초창기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자동차기자협회]

처음엔 쉽지 않았다. 자동직기로 번 돈을 자동차에 쏟아붓는 탓에 회사가 망할 것이란 얘기도 들었다고 한다. 초창기 만든 트럭에 대해선 고객 불만도 상당했다. 키이치로 본인이 트럭을 산 고객에게 직접 사과하며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차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객에게 판매하는 게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 것도 당시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도요타가 고객제일주의를 선언한 배경이다.

지금의 사명은 자동차 회사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겼다. 사키치의 이름을 딴 ‘도요다’에서 ‘도요타’로 바꿨다. 획수를 10개에서 8개로 줄이는 한편 사주와 회사를 별개로 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외국에서 발음이 어렵다는 지적도 있었다. 도요타가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이름을 떨친 적시생산방식(Just In Time)도 키이치로 사장이 재직할 당시부터 있었다. 도요타는 당시에도 창고 없이, 즉 원자재나 부품 재고를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자동차를 만들었다.

도요타 자동차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도요펫 크라운(오른쪽)과 렉서스 LF-A. 도요타 쿠라가이케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사진제공:한국자동차기자협회]

키이치로는 1952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등졌다. 올해 초 유명을 달리한 키이치로의 아들 도요다 쇼이치로는 아버지에 대해 글로벌 감각이 있던 인물, 발빠른 실행력을 높이 여겼다. 무엇보다 현장을 중요시한 점도 존중했다. 요리야스 부관장은 "도요타 히가시 연구소는 2000여명이 살 수 있는 ‘우븐시티’를 짓는 도전을 하고 있다"며 "키이치로 역시 과거 본인이 살던 시절 자동차에 도전한 것처럼 지금 도요타도 큰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븐시티는 도요타가 그리는 미래형 도시로 아키오 회장의 아들 다이스케가 사장을 맡아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고야·도요타(일본)=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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