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의 여성들은, 살아있는 '불꽃'이다
[이진민 기자]
▲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
ⓒ 지브리 스튜디오 |
세계관에서 피어난 여성들, 그들은 한 떨기의 가녀린 꽃이 아니다. 디즈니의 여성은 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위기에 처한 왕국을 구한다. 마블의 여성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빌런을 해치운다. 그렇다면 지브리의 여자는? 그들은 손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쥐고 위태로운 세상에 뛰어든다. 때론 세상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브리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10년 만에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선보였다. 난해한 세계관, 복잡한 미쟝센에 자칫 길을 잃을 법한 영화에 누군가 '불길'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무너진 세상을 구원한 여성 캐릭터 '히미', 다시 만난 지브리의 여성은 어둠을 잠식하는 불꽃이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 장면. |
ⓒ 메가박스중앙㈜ |
하지만 새롭게 선보인 여성 캐릭터 '히미'는 지브리만의 독보적인 여성상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히미는 자유자재로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현실 세계의 영혼 '와라와라' 무리를 구하고 앵무새의 습격을 받은 주인공 '마히토'를 구출한다. 히미는 자신의 능력을 오직 위기에 처한 타인을 구할 때만 사용한다.
본질적으로 '불'은 파괴다. 거대한 숲도 불길 한 번이면 꿈틀대는 생명력을 뒤로한 채 잿더미가 되지 않던가. 그러나 동시에 생명과 창조의 힘을 지녔다. 타오르는 불은 따뜻한 온기를 주고 문명의 불씨를 지피며 악한 것을 태우기도 한다. 히미의 캐릭터성은 불에 얽힌 상징성을 관통한다.
히미는 불을 다루는 초능력을 발휘해 세계를 점령하려 하는 악당을 물리치고 주인공과 와라와라 무리를 구출한다. 또한 자신의 동생 '나츠코'가 터부(taboo)에 갇혀 세뇌당하자 모조리 태워 없애버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히미는 주인공이자 자신의 아들인 마히토를 낳기 위해 건물 화재로 죽게 될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미래를 택하기도 한다.
히미는 자신의 초능력을 활용해 '마히토'와 함께 세상을 구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여성 캐릭터다. 뭐든지 태워버릴 수 있는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끝내 불 속에서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아들의 탄생은 포기할 수 없는 히미. 그가 지나간 길에는 그을음이 아닌 희망을 되찾은 세상과 가족이 있었다.
▲ 영화 <원령공주> 속 여성 캐릭터 '에보시 고젠' |
ⓒ 지브리 스튜디오 |
불과 얽힌 지브리의 여성은 '히미'만이 아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1997년에 개봉한 <원령공주> 속 여성 캐릭터 '에보시 고젠'. 주인공에 대항하는 빌런인데도 오래도록 지브리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인기 캐릭터다. '히미'가 불을 다룰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면, '에보시'에겐 불을 다루는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지성이 있다.
에보시는 숲의 신이자 멧돼지인 '나고'에게 공격받던 마을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화기(火器)를 개발한다. 화기 보급에 마을은 급격히 부강해졌고 에보시는 더 많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는 산을 개간하여 제철소를 만들고 그 속에 사는 동물과 수호신을 화기를 사용해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한다.
에보시는 마을의 번영을 위해 자연을 훼손하여 주인공 '아시타카', '산'과 대립하는 빌런이지만, 지략과 비전을 겸비한 여성 리더이기도 하다. 그는 마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무기 사용법을 가르쳤으며 나병으로 외면받은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는 지도자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마을 발전을 이끈 에보시의 면모는 그를 단순히 '빌런'이라 치부할 수 없게 한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던 에보시, 결국 사슴신과의 대결에서 부하들과 자신의 오른팔마저 잃게 된다. 끝내 에보시는 변화하지만, 그렇다고 꺽이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다시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재건하겠다고 다짐한다. 강인함과 더불어 실수를 반성할 수 있는 유연함까지, 지브리의 매력적인 빌런 '에보시'는 사람들을 이끄는 등불 같은 여성이다.
지브리의 여성들은 두 발로 서 있다
지브리의 여성들은 설령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닐 때도 결코 남성 캐릭터에게 기대지 않는 주체적인 캐릭터성을 보여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는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가며 남성 캐릭터 '하울'과 함께 마녀와 맞서 싸운다. <원령공주>의 '산'은 남성 캐릭터 '아시타카'와 함께 수호신을 보호하며 사람도, 신도 아닌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한다.
지브리의 여성들은 불행한 운명에 고개 숙이거나 남성 캐릭터에게 문제를 떠넘기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삶을 견뎌내기 위해 두 발로 서서 사람으로, 여성으로 존재한다.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애쓰는 지브리 속 여성들이 현실 속 여성들에게 말을 건다. 마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히미'처럼, <원령공주>의 '에보시'처럼. 그렇다면 현실의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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