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페라 ‘노르마’ ‘투란도트’, 흥미롭지만 공감 안되는 연출

장지영 2023. 10. 3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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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결말 바꾼 레지테아터 스타일…관객들은 여지원과 이용훈에 주목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이윤정(왼쪽)과 칼라프 역의 테너 이용훈이 출연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오페라 팬이라면 10월 26~30일 서울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각각 오른 ‘노르마’와 ‘투란도트’를 놓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특히 두 작품에는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느라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소프라노 여지원과 테너 이용훈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게다가 한국에서 평소 보기 어려웠던 파격적인 레지테아터가 예고된 터였다. 레지테아터란 연출가가 텍스트에 쓰인 대로 시·공간을 재현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해 배경과 분위기는 물론 캐릭터나 결말까지도 바꾸는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올해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벨리니 ‘노르마’는 영국 로열오페라극장에서 2016년 알렉스 오예 연출로 선보인 프로덕션이다. 당시 전 세계에 생중계된 데다 이미 한글 자막 DVD로도 출시돼 있어서 오페라 애호가들은 이미 알고 있는 프로덕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작인 ‘노르마’가 그동안 겨우 두 차례 공연된 것이 전부인 데다, 영상이 모두 담을 수 없는 스펙터클과 현장감을 라이브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노르마’, 점령군과 피지배 집단 대결 구도 약화

소프라노 여지원이 타이틀롤을 맡은 예술의전당 ‘노르마’의 한 장면. 2016년 영국 로열 오페라극장 프로덕션을 가져온 것이다. 예술의전당

오예는 1992 바르셀로나올림픽 개·폐막식 연출로 유명한 스페인 카탈루냐 연출가 그룹 푸라 델스 바우스의 핵심 예술가 6명 가운데 한 명이다. 1996년부터 오페라 연출을 시작한 이후 오예는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독창적인 무대와 참신한 해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여기에는 오예의 콘셉트를 시각화하는 무대디자이너 알폰스 플로레스의 기여가 만만치 않다. 로열오페라극장의 2016년 ‘노르마’ 역시 3000여 개의 십자가로 구현한 무대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노르마’는 고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에서 드루이드교 대사제 노르마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 내연 관계인 데서 시작된다. 제사장 오로베소의 딸인 노르마는 순결 의무를 어기고 폴리오네와의 사이에서 몰래 두 아이를 낳은 사이다. 하지만 폴리오네의 마음이 어린 여사제 아달지사에게 있는 것을 안 노르마는 괴로움을 겪다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노르마는 두 아이를 아버지에게 부탁한 뒤 불 속에 뛰어들고, 예전의 사랑이 되살아난 폴리오네 역시 노르마를 뒤따른다.

오예는 고대 로마 시대가 배경인 ‘노르마’의 무대를 현대로 옮겨놓았다. 특히 로마의 지배에 맞서는 드루이드교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대에도 존재하는 극단적 기독교 공동체와 그 속에서 억압당하는 개인의 이야기로 바꿨다. 이를 위해 십자가와 면류관 등의 상징들을 활용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바꾸는 과정에서 원작에서 중요한 점령군과 피지배 집단의 대결 구도가 희미해지다 보니 폴리오네라는 캐릭터가 이상해졌다. 게다가 맨 마지막에 오로베소가 불 속에 뛰어드는 딸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은 딸의 고통을 줄이고 싶은 아버지의 애정을 나타내는 연출이지만, 노르마의 희생이나 카리스마를 약화시킨다.

예술의전당이 전관 객관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노르마’는 2016년 영국 로열 오페라극장 프로덕션을 가져온 것이다. 예술의전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노르마 역으로 첫 타이틀롤 데뷔를 한 소프라노 여지원을 비롯해 주역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보긴 어려웠지만 안정적으로 캐릭터를 소화했다. 특히 여지원은 1막에서 다소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불안하면서도 위엄있는 노르마 역을 잘 보여줬다.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투란도트의 죽음으로 결말

한편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는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의 국내 데뷔 무대라는 점 때문에 오페라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이용훈은 2007년 데뷔 이후 동양인 테너로는 드물게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의 주역으로 활동해 왔지만, 국내에선 2016년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에서 잠깐 출연한 것 외엔 콘서트조차 갖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 연극계의 거장인 연출가 손진책이 처음으로 오페라 연출에 나섰다는 점 역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투란도트’는 세계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와 함께 가장 자주 공연되는 푸치니의 유작이다.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선조인 로링 공주가 침략자에게 유린당한 탓에 남자를 혐오하며 결혼을 거부하는 투란도트 공주의 이야기다. 투란도트가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구혼자들이 참수당하는 가운데 멸망한 타타르 왕국 출신의 칼라프 왕자가 마침내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그리고 칼라프는 자신을 사랑하는 시녀 류의 희생으로 투란도트의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이윤정(왼쪽)과 류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이 출연한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그런데, 푸치니가 류의 죽음 장면까지만 작곡한 뒤 타계하는 바람에 지금의 ‘투란도트’는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감독 아래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가 미완 부분을 마무리한 것이다. 다만 아무리 동화 원작이라도 투란도트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결말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초연부터 나왔다. 칼라프의 강제 키스는 되려 투란도트의 트라우마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또한, 칼라프도 자신을 사랑해서 자결한 류를 보고도 투란도트에 구애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권력욕으로 해석된다.

결국, 레지테아터가 등장한 이후 ‘투란도트’의 새로운 결말이 시도됐다. 기존의 중국풍 해피엔딩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투란도트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20세기 말부터 여러 연출가가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구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는 결말을 택하고 있다.

이용훈, ‘네순 도르마’ 박수갈채에 공연중 두 번 불러

손진책은 이번에 ‘투란도트’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국가로 바꿨다. 류의 죽음까지는 기존의 버전과 비슷하게 전개되지만 이후 피날레에서 투란도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결말을 택했다. 하지만 다른 버전과 다른 점은 투란도트가 류와 함께 영혼으로 등장해 칼라프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밝힌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그동안 어두컴컴했던 무대가 하얗게 바뀌고 검은 옷을 벗고 흰옷으로 갈아입은 군중이 노래하며 끝난다. 류의 희생을 토대로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대신 국가 전체를 구원하는 관점으로 풀어냈다.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의 국내 데뷔 무대인 서울시오페라단의 ‘투란도트’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손진책의 이번 연출은 아직도 한국에서 뿌리 깊은 남성 중심적 관점으로 ‘투란도트’를 해석했다고 보인다. ‘연출노트’에도 적었듯 손진책은 투란도트를 히스테리와 트라우마로 남자와의 접촉을 부정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자와의 접촉을 광적으로 집착하는 캐릭터로 봤다. 모권제 사회를 상징하는 투란도트가 죽어야만 칼라프가 상징하는 율법과 질서의 사회가 나온다는 손진책의 보수적 해석은 현대 관객의 눈높이나 세계적인 흐름과는 차이가 크다.

한편 칼라프를 연기한 이용훈은 ‘리리코 스핀터 테너’로서의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덕분에 29일 공연에서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부르고 난 뒤 박수가 계속되자 앙코르(Bis) 연주가 이뤄졌다. 야외 축제라면 몰라도 실내 극장에서는 공연 중 앙코르가 전체 흐름을 끊기 때문에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용훈의 국내 데뷔 무대인 만큼 관객 서비스로 볼 수 있다. 이날 이용훈 외에도 류 역의 서선영과 투란도트 역의 이윤정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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