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보가 된 '백제의 칼'

임영열 2023. 10. 2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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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물유적] 백제왕이 제후국 왜왕에게 '하사'한 신검... 일본 국보15호 '칠지도'

[임영열 기자]

 칠지도 재현품. 앞면(좌)과 뒷면(우).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전체 길이 74.9cm, 칼 본체의 길이는 65cm, 6개의 가지는 각각 10cm, 폭은 2.5cm 두께 0.3cm다
ⓒ 한성백제박물관
       
일본의 옛 수도 나라현(奈良縣). 고대 일본의 역사와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이곳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소노카미 신궁(石山神宮)'이 있다. 이 신궁은 4세기경 일본 역사상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루었던 야마토(大和) 정권에서 군사와 형벌을 담당했던 호족인 모노노베(物部)의 조상을 받들고 있는 신사(神社)다.

이곳은 일본에 산재해 있는 약 9만여 개에 이르는 여느 신사보다 격이 높은 신을 배향하는 곳으로 초대 천황으로 알려진 '신무천황'이 사용한 신검을 모시고 있다.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도 '신궁(神宮)'이라 기록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신도들이 참배하는 공간인 '배전(拝殿)'은 일본 신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이소노카미 신궁에는 먼 옛날부터 전설과도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신궁 안에는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출입금지 구역인 '금족지(禁足地)'가 있고 이곳 '신고(神庫)'에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육차도(六叉刀)'라는 신기한 검(劍)을 모셔둔 상자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든 이 상자를 여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신고가 천황가의 보물창고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신성한 보물들을 함부로 공개하거나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이런 전설이 생겨났다고 믿었다.
   
 일본 나라현 텐리시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 일본 국보 15호 칠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신검 '칠지도'

그렇게 신궁의 보물창고에서 1500여 년 동안 철저하게 봉인되어 있던 금기의 보물상자가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1873년 신궁의 책임자로 '스가 마사토모'(菅政友1824~1897)가 대궁사(大宮司)로 취임한다.

일본의 내무성 관료이자 대표적인 국수주의 역사학자였던 스가 마사토모는 신궁의 도굴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천황의 허락을 받아 신궁내 금족지 일대를 발굴한다. 신궁은 야마토 정권 시절 무기고로 사용했던 장소였기에 환두대도를 비롯한 도검류와 동경, 비취색 곡옥등 천황을 상징하는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마사토모는 신고의 구석에 놓여있는 보물상자를 열었다. 아무리 역사학자지만 '저주의 전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여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칠지도 앞면(상) 뒷면(하) 금상감기법은 칼에 글자를 새기고 이를 예리하게 파낸 뒤 그 사이에 금을 밀어 넣는 고도의 금속공예 기법이다
ⓒ 한성백제박물관
 
상자 속에는 가운데 칼날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어긋나게 세 개씩 날이 솟아 마치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나무처럼 보이는 '육차도(六叉刀)'가 있었다. 전설은 미화되고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육차도의 전설은 사실로 밝혀졌다. 칼은 심하게 녹이 슬어 있었고 부러진 상태였지만 녹 사이로 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사토모는 그때의 순간을 "녹슨 칼에 금빛이 보여 녹을 제거 하니 칼 몸체에 금으로 상감된 글자가 보였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금상감이란 칼에 글자를 새기고 이를 예리하게 파낸 뒤 그 사이에 금을 밀어 넣는 고도의 금속공예 기법이다. 훗날 고려청자 상감기법은 이를 응용한 것이다.

전체 길이 74.9cm, 칼 본체의 길이는 65cm, 6개의 가지는 각각 10cm, 폭은 2.5cm 두께 0.3cm로 확인됐다. 칼은 부러진 상태로 놓여있었다. 마사토모가 녹을 긁어내자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칠지도.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의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진 명문이 선명하게 보인다. 앞면에는 제작시기와 제작 과정과 특징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제작 목적이 새겨져 있다
ⓒ 한성백제박물관
 
앞면에는 칼을 만든 과정과 특징 및 제작 연·월·일이 뒷면에는 칼을 제작한 목적이 새겨져 있었다. 명문은 훼손이 심해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견으로 모아졌다.

앞면에 새겨진 34자는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으로 뒷면 27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로 판독하고 있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병화를 물리칠 수 있으니, 마땅히 제후국의 왕에게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 왕의 명을 받들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칼은 처음 발견 당시 부러진 상태였기에 마사모토는 여섯 개의 날이 달린 쇠창으로 생각하고 '육차모(六叉鉾)'라 기록해 두었으나 명문이 발견되고 이 칼의 이름이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칠지도(七支刀)'란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명문에는 '백제왕(百濟王)'과 '왜왕(倭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고대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학계의 많은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다. 칼에 새겨진 61개 글자 중에서 앞면 8개 글자와 뒷면 5개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백제와 왜의 상·하관계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면 첫 문장은 대체로 ‘태화 4년’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2000년 들어 ‘봉원(奉元) 4년’으로 보는 새로운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봉원 4년은 서기 408년으로 백제 전지왕이 집권하던 시기다
ⓒ 한성백제박물관
1981년 일본 NHK 방송의 X-선 촬영 사진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일본의 학자들은 칠지도 명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제작 시기를 '태화(泰和) 4년'으로 해석했다. 태화 4년은 중국 동진의 연호로 서기 369년이 된다.

서기 369년은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년)이 집권한 지 24년째 되는 해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다.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왕권이 미치지 않은 지방에 '담로(擔魯)'을 파견해 왕권을 강화하고 일본에 아직기와 왕인박사를 보내 학문과 문화를 전파했다.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며 중국과 왜를 잇는 삼각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렇듯 막강한 국력을 가진 근초고왕은 제후국이었던 왜에 칠지도를 하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나라 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친일사관을 주도했다고 비판을 받는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도 '태화'를 백제의 고유 연호로 해석하고 칠지도는 백제 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근초고왕은 백제의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다
ⓒ 오마이뉴스 김희태
 
또한 뒷면에 새겨진 마지막 문구 '전시후세(傳示後世)'는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라는 뜻의 명령어로 이는 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음을 입증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칠지도의 제작시기를 '태화 4년'이 아니라 '봉원(奉元) 4년'으로 보는 새로운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봉원 4년은 백제 18대 왕 '전지왕(腆支王)'의 집권 시기로 서기 408년이 된다.

제작 시기와 관련해서 몇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다 할지라도 칠지도는 황제의 지위에 있던 백제왕이 제후국이었던 일본의 '후왕(候王)'에게 '하사' 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다.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 했다 주장하는 일본

4세기 무렵 한·일 고대사는 관련 자료 부족과 해석의 차이로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칠지도 역시 1880년대 중국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한·일 역사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뒷면에 새겨진 마지막 문구 ‘전시후세(傳示後世)’는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라는 뜻의 명령어로 이는 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음을 입증한다
ⓒ 한성백제박물관
 
우리 학계에서는 칠지도의 제작시기를 369년 또는 408년으로 보는 견해가 공존하지만 일본에서는 칠지도의 제작시기를 태화 4년(369년)을 고집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일본은 369년에 집착하는 것일까. 일본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역사서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편에 따르면 신공 49년(369년) "왜가 한반도에 건너가 가야 7국을 점령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372년 백제가 이에 보답하는 의미로 사신 구저(久氐)등을 보내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온갖 보물을 바쳤다"라고 전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가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바로 그'칠지도'라 주장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백제왕이 369년에 칠지도를 만들어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헌상'한 조공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했던 칠지도 재현품
ⓒ 김만성
 
한발 더 나아가 칠지도를 4세기 후반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고 200년간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 가치를 인정하여 일본은 1953년에 칠지도를 국보 제15호로 지정했다.

이렇듯 칠지도와 관련된 자료가 부재한 상황에서 일본서기의 기록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일본은 '태화 4년 설'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8세기초 일본 천황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일본서기'는 역사적 논증보다는 황국사관에 의해 일본 중심적으로 왜곡하고 조작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임나일본부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공식적으로 폐기한 바 있다. 역사적 진실은 아무리 '날조'하고 '각색'한다고 해서 결코 감춰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1600여 년 전 백제땅에서 백번이나 단련된 강철로 만들어 제후국이었던 왜왕에게 하사된 후 일본의 국보가 된 신검 칠지도. 이는 단순한 칼이 아니라 4세기 강력했던 백제의 국력과 왕권의 상징이었다. 칠지도에 새겨진 61자의 금상감 명문은 이를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에 전시한 칠지도 원본.1953년 일본 국보 제15호로 지정됐다
ⓒ 국립부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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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39호(2023년 11월, 12월)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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