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즈는 나의 자부심… 빅리그서 평균이상 목표”
“항상 제 뒤에 팬들이 계셔서 제겐 너무 큰 힘이 됐습니다. 팬들의 자부심이 되려고 노력했고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딜 가서도 히어로즈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프로야구 키움 히어로즈 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린 지난 10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은 평소보다 북적였다. 우승이나 5강 싸움과 동떨어진 평일 저녁 맞대결에 1만1757명이 운집했다. 키움의 승리로 경기가 끝난 뒤 한 선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8회 대타로 출전해 3루수 땅볼로 물러난 이정후였다.
이정후가 7년간의 KBO리그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레전드 이종범의 아들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프로에 입성한 그는 어느덧 한국 간판타자로 자라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냈다.
예견된 일이었다. 국내에선 더 오를 곳이 많지 않았다. 2017년 데뷔 시즌부터 타율 0.324에 179안타를 치며 리그에 충격을 안겼다. 2년 차 징크스 없이 성장한 그는 2020년 처음으로 100타점을 넘겼다. 지난 시즌엔 리그 최우수선수(MVP)까지 거머쥐었다.
‘국제용’ 면모도 꾸준히 입증했다. 첫 성인 태극마크를 단 2017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을 시작으로 아시안게임과 프리미어 12,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까지 두루 거쳤다. 대표팀 중심타자로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도 제 몫을 했다.
그가 해외에 나간 자기 모습을 처음 그려본 건 2년 전이었다. 이정후는 지난 20일 국민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때까진 (해외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며 “어릴 땐 친구들과 야구하는 게 마냥 즐거웠다”고 돌이켰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프로와 대학 사이에서 좌절하는 선배들을 보며 ‘철이 들었’다. 현실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하고 나서 프로 선수의 꿈을 진지하게 좇게 됐다. 빅리거는 그런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였다.
생각이 바뀐 계기는 도쿄올림픽이었다. 앞서 출전했던 국제대회에선 새로운 경험이 마냥 재밌었는데, 도쿄에서 한 차원 강한 상대들을 마주하면서 승부욕과 자신감이 함께 생겼다. ‘더 큰 무대에서 매 경기 이런 공을 때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론 탄탄대로였다. 지난 시즌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며 타격 5관왕(타율 출루율 장타율 타점 최다안타)에 올랐다. 팀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놨다. 2023시즌을 끝으로 포스팅 시스템(비공개경쟁입찰)으로 빅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키움 측도 흔쾌히 허락했다.
줄곧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올해 시련이 찾아왔다. 개막 후 첫 한 달 동안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월간 타율이 0.218로 데뷔 이래 가장 낮았다. 팀 성적도 8위까지 떨어졌다. 기술적 문제보단 정신적인 측면이 컸다. 이정후는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나 때문에 팀이 무너진다는 느낌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설상가상으로 여름엔 뜻밖의 부상도 찾아왔다. 부진에서 벗어나 한창 맹타를 휘두르던 지난 7월 22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수비 도중 발목 통증으로 교체됐다. 검진 결과 힘줄을 감싸는 막인 신전지대가 손상됐고 그대로 수술대에 올랐다. 시즌 아웃으로 소속팀 전열을 이탈한 것은 물론 아시안게임 태극 마크까지 반납했다.
해외 진출을 앞두고 한층 뜨거워진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관심이 혹여나 조바심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을까. 이정후는 이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올해 1년만 보고 데려가려는 건 아니지 않겠느냐”며 “(시즌 전엔) 하던 대로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정후는 올 시즌 부침을 두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왜 이런 일이 생기나’하는 원망도 들었지만, 마음을 긍정적으로 고쳐먹었다. 프로 데뷔 후 처음 겪은 슬럼프와 그로부터 반등하는 과정을 통해 또 한 번 성장했다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기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천성도 한몫했다.
이에 더해 부모와 팀 동료·선후배, 코칭 스태프의 존재도 큰 힘이 됐다. 팬들의 성원은 물론이었다. 이정후는 “다들 항상 믿어주고 힘을 실어준 덕분에 얼른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감사를 전했다.
보장된 길 대신 도전을 선택한 그에게 가족은 전폭적 지지를 보냈다. 선수 시절 일본 무대에 도전했던 부친 이종범 LG 트윈스 코치로부턴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조언도 들었다. 이정후는 “친구나 가족 없는 곳에 혼자 가지 않느냐”며 “야구 이전에 생활 자체가 많이 힘들 거라 말씀하셨다”고 설명했다.
옛 팀 선배도 응원의 말을 건넸다. 이정후와 같은 키움 출신으로 포스팅을 통해 빅리그에 먼저 자리 잡은 김하성은 앞서 지난 11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이정후를 “완성형에 가까운 타자”라고 평했다. 해줄 말이 있냐는 취재진 질문에 조언할 게 딱히 없을 만큼 빼어난 후배라고도 칭찬했다.
이정후 본인은 “거기(빅리그) 선수들과 비교하면 다 부족하지 않겠느냐”며 “일단 부딪혀 보고 보완해 나가겠다”고 몸을 낮췄다. 다만 포부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 리그에서 평균적인 선수로 남고 싶진 않다. 그 이상의 선수가 되고 싶다”며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만 어린 만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진출이 성사될 시 최우선 목표론 주전 확보를 내세웠다. 빅리그에서 주전으로 뛴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인 만큼 이후는 그 뒤에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상대해 보고 싶은 투수론 빅리그 대선배 류현진을 꼽았다.
7년간의 KBO리그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면서 키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우리 팀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후회는 없다던 그가 털어놓은 단 한 가지 아쉬움도 키움 소속으로 우승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지난해 포스트시즌을 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프로에 처음 발을 디뎠던 신인 시절, 또 다른 한국시리즈 진출 시즌이었던 2019년도 그에게 의미가 남다른 시기였다.
팬들에겐 ‘정말 감사한 존재’라며 거듭 고개 숙였다. 이정후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부상에서 꼭 복귀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도 팬분들이었다”며 “제 마지막을 그라운드에서 절뚝이는 모습으로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더 열심히 재활에 임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정후에게 키움에서 보낸 나날은 어떤 의미였는지 물었다. ‘내 20대 초·중반이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시간’이란 답이 돌아왔다. “정말 좋은 구단에 들어와서 제 청춘을 잘 보냈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했고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서로 좋은 인연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낸 게 아닌가 해요.”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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