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관제 행사 말고 159명 영정 앞에서 눈물로 사과하라"

[현장] 이태원 참사 1주기, 유족들 거리 행진... 시민도 "힘내세요!" 박수로 연대

[김화빈, 유성호 기자]

▲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4대종교기도회에 참석한 유가족과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4대종교기도회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저희는 정치집회가 아닌 추모대회에 가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도 159명의 영정 앞에서 진정으로 눈물 흘리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 유형우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고 유연주씨 아버지)

10.29 이태원참사 1주기. 유족들이 좁은 골목에서 헌화를 마친 뒤 용산 대통령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뗐다. 손에는 '참사 진상을 규명하라'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라'는 팻말이 들려있었다. 유족들은 보라색 점퍼를 함께 맞춰 입었다. 옷깃에는 보라색 별과 리본이 달려있었다. 이태원 골목 보며 한참을 울던 한 어머니는 뻘게진 눈가를 손으로 눌러 닦으며 걸었다.

골목 밖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유족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힘내세요"라고 외쳤다. 경찰들이 유족과 시민들의 발걸음을 에워쌌다. 인도를 걷던 시민들은 차도에 선 긴 행렬에 놀랐지만, 곧 이태원 참사 유족임을 알아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20분쯤 걷던 유족들이 대통령실 앞에서 멈춰섰다. 유형우 부위원장은 차량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 "오늘 이 자리는 정치집회가 아닌 추모대회"라며 "오늘만큼은 온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애도하고자 한다. 오늘 추모 메시지를 발표한 대통령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정치 집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1주기 추모대회 불참을 결정한 데 대한 유족들의 대답이었다.

유 부위원장은 "(참사 직후) 영정과 위패 없던 분향소를 5일 내내 조문했던 대통령의 행동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진심어린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라며 "저희(유족)들이 없는 곳에서 애도하지 말고 저희가 준비한 추모대회에 와달라. 자리를 비워둔 채 대통령님을 기다리겠다"며 거듭 대통령의 공개적인 사과를 호소했다.

골목 앞에 선 유족들 "저기서 죽어가고 있었나" 통곡

▲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4대종교기도회에서 유가족과 종교인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하고 있다.

▲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4대종교기도회에서 유가족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하고 있다.

29일 오후 1시께 이태원 골목. 159명의 희생자를 위한 4대 종단(개신교·천주교·원불교·불교)의 기도가 시작되기 전부터 골목은 추모하는 시민들로 붐볐다. 저마다 다른 포장지로 감싸진 국화가 추모의 벽 앞에 새로 포개졌다. 시민들은 어두운 계열의 착장을 하고 골목을 찾았다.

불법 건축물을 증축해 참사를 키웠던 해밀턴 호텔 외벽 광고판에는 10.29 핼러윈 참사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띄워져 있었다. 노르웨이 국적의 외국인 희생자(연세대학교 어학당 학생) 가족 4명은 희생자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골목을 지켜봤다. 차마 골목으로 들어서지 못한 한 어머니는 "저기서 붙어서 죽어가고 있던 걸 보고만 있었냐"고 통곡했다.

송진영(고 송채림씨 아버지)씨는 골목 입구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어도 우리 아이들은 혜택을 입을 수 없다. 살아 돌아오지도 않는다"면서도 "우리 아이들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골목 안쪽에서 만난 임익철(고 임종원씨의 아버지)씨는 "1년이 지났는데 바뀐 것도 없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서도 "저희를 잊지 않고, 참사에 공감하고 조문하러 와주신 시민들이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추모대회에 사실상 불참 뜻을 밝힌 윤 대통령에 대해선 "대통령은 1년 내내 일관되게 이 참사를 '정치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오늘 불참이 향후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이 될까 몹시 불안하다"며 "관제 추모대회가 아닌 오늘 우리가 마련한 자리에 와서 진솔하게 유족들을 위로해 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골목 위쪽에선 사람들을 구하려 애썼던 미군 3명의 얼굴을 점토로 표현하던 박주혁씨는 <오마이뉴스>에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영웅 대접을 받았을 분들"이라며 "짧게 기사만 나가고 잊힌 게 안타까워 기억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진하는 유족들 앞에 서서 '국가는 없었다. 정부의 책임 인정하라'는 대형 펼침막을 들었던 채유빈씨는 "책임자들은 다 진상규명 됐다고 얘기하지만, 유족들 입장에선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다"며 "오늘의 연대가 유족들께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채씨는 특히 이날 골목을 찾은 외국인 희생자 유족들을 언급하며 "예전엔 서울광장 분향소에 한국인 희생자들이 많이 계셨는데 최근에 찾아갔을 때는 외국인 희생자들의 영정도 많이 늘었다"며 "낯선 땅에서 참사로 소중한 가족을 잃었는데 매우 황망하고 답답하실 것"이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면서 "오늘 다른 유족분들과 함께 계시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희생자들 안녕 기원한 기도회에서 고개 떨군 유족들

▲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참사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4대종교기도회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이 희생자들을 기리며 추모하고 있다.

4대 종단 종교인들은 오후 2시께 이태원 골목 앞 차도에서 '추모, 기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다짐'을 위한 추모기도를 올렸다. 이날 기도회에는 유족 100여 명을 포함해 5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안식을 기원하는 기도를 들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개신교 측 추모자로 나선 참행복한교회 이한별 전도사는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과 평안을 바라는 159개 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달라"며 "그늘진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작지만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평화의 별이 빛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대한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선우스님은 "또다시 이 땅의 세월호, 이태원, 오송참사와 같은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선 안 된다"며 "대통령께서는 안타깝게 생을 떠나신 희생자들에게 엎드려 진심으로 사죄하시라. 모든 국민들이 바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여야 정치인들은 반드시 올해 11월 정기국회에서 특별법을 통과시키라"고 촉구했다.

유족, 종교인, 시민들은 기도가 끝난 뒤 한목소리로 "이태원 특별법을 제정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사과하고, 이상민 장관은 사퇴하라"고 외쳤다.

이후 유족들은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용산 대통령실 앞, 삼각지역 등을 거쳐 분향소가 마련된 시청역 5번 출구까지 행진했다.

유족들은 서울광장에서 오후 5시께 본 추모대회를 열고 각계 인사들의 추모사와 함께 추도공연, 유가족 편지 낭독,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1주기 추모대회에는 국민의힘 유의동 정책위의장, 이만희 사무총장, 인요한 혁신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홍익표 원내대표,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조희연 서울교육감, 김동연 경기도지사 등 정관계 인사들이 참석한다. 희생자가 발생한 국가인 주한 이란대사와 주한 러시아대사관 영사도 참석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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