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와 파스타에 이 와인이면 말이 필요없지요

임승수 2023. 10. 29.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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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이탈리아 요리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자말>

[임승수 기자]

작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는데 바로 낮술이다. 대낮부터 낯빛이 홍익인간(紅益人間)이 되어 배시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그 이후의 시간을 허비해도 문제없다는 여유로움과 넉넉함의 표현이다.

15,000원짜리 책 팔아봐야 인세 1,500원 떨어지는 아득하고 막막한 삶이다 보니, 어쩌면 부족한 돈 대신 남아도는 시간으로나마 호기와 허세를 부려보려는 심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서푼짜리 작가의 낮술은 의뭉스럽게도 과시적 형태를 띤다. 해가 한창 중천에 걸려 있는 시간대에 술병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대는데, 부를 뽐내는 이들이 자기 소유의 람보르기니, 페라가모, 에르메스 같은 명품 사진을 올리는 심정과 비슷하려나. '너희들 지금 일하고 있지? 나 지금 술 빨고 있어!' 쯧쯧. 그건 한량 아니냐고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몰랐는가? 원래 작가와 한량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지난 15일 일요일 오전 11시 30분도 그러한 맥락의 시간이었다. 부부 작가인 나와 아내는 두 딸을 동반하고 대학로의 유명 피자집 개장 시간에 맞춰 방문해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이튿날인 월요일뿐만 아니라 그다음 날인 화요일마저도 아무런 스케줄이 없는 시간 부자로서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가방 안에서 3만 원대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참고로 콜키지를 지불하면 주류 반입이 가능하다는 사전 안내를 받았다.

토마토소스와 산지오베제의 강한 산미는 훌륭한 조화
 
▲ 카스텔로 디 몬산토 키안티 클라시코 붉은 과실 향이 감도는 상큼한 신맛과 두툼한 타닌이 매력 포인트다.
ⓒ 임승수
 
'카스텔로 디 몬산토 키안티 클라시코'. '카스텔로 디 몬산토'는 와인 회사 이름이며 '키안티 클라시코'는 이탈리아 키안티 클라시코 지역의 산지오베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의미한다. 붉은 과실 향이 감도는 상큼한 신맛과 제법 두툼한 타닌이 산지오베제의 매력 포인트인데, 이탈리아 음식점이니만큼 일부러 이탈리아 와인을 챙겨온 것이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탭오더가 테이블마다 설치되어 있다. 문명의 이기가 부담스러운 반백 살 아저씨티를 풀풀 내며 어렵사리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하고 기다리니 직원분이 와인 잔과 빈 접시부터 가져다주었다. 자동반사적으로 코에 잔을 가져갔다. 숨을 들이쉬며 물비린내 여부를 확인하는데, 아이고야! 당첨이네.

까탈스럽지 않게 보이려고 담백한 미소를 머금고서는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물비린내 없는 잔으로 교체했다. 깨끗한 잔을 테이블에 놓고 와인을 또르르 따르니 쌉싸름한 흙 향과 은은한 연기 향을 품은 붉은 과일 계열의 내음새가 이 피자집의 상징물인 참나무 장작 화덕 온기처럼 테이블 주위로 퍼져나간다. 이런 발향력이라면 기대하지 않을 수 없지.

엥겔지수 높은 삶을 지향하는 나와 아내 덕분에 맛 감식안이라면 또래 상위 0.1%에 속할 것이 확실한 첫째(중1)와 둘째(초4)가 갓 조리되어 나온 뜨끈한 피자와 파스타를 맛보고는 포크와 숟가락 놀리는 속도를 확연하게 끌어올린다. 그래. 너희도 제대로 느꼈구나. 학원 안 보내고 그 돈을 식비에 투자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 이탈리아 음식과 이탈리아 와인 서로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그쪽 사람들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페어링이니까.
ⓒ 임승수
 
와인과 음식 페어링 정보를 찾다 보면 신맛이 강한 음식에는 더욱 강한 신맛의 와인을 선택하라는 조언을 자주 접한다. 낮은 산도의 와인이 쨍한 신맛의 음식을 만나면 기죽고 주눅 들어 본연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요리는 신맛이 강한 토마토소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지오베제의 강한 산미는 토마토소스와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와인 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본 탑재된 미각 하드웨어의 고성능으로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 아내는, 주문한 음식 중에 토마토소스 들어간 것과 안 들어간 것을 각각 와인과 곁들이더니 다음과 같이 평한다.

"토마토소스가 키안티 클라시코와 너무 잘 어울리네."
"맞아. 토마토소스 음식과 산지오베제 와인의 궁합이 유명하거든. 이탈리아 와인은 이탈리아 음식과 잘 어울릴 수밖에 없어. 그쪽 사람들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페어링이니까. 막걸리에 파전, 소주에 닭똥집 같은 거지."
"입에서 단맛이 느껴질 정도야. 참 훌륭하네."

이 집의 토마토소스는 다소 질퍽한 질감에 감칠맛이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풍미가 깊다. 그래서 단맛이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져간 와인은 2020 빈티지이다. 지금도 충분히 맛있지만 타닌이 살짝 강한 느낌이 있어 2년 정도 묵히면 더욱 훌륭해질 듯하다.

예전에는 신맛과 타닌이 도드라지는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에서 종종 중간이 비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수비와 공격만 있고 미드필더가 비어있는 뻥축구랄까. 하지만 지금은 이 공간이 음식을 위한 여백임을 안다. 와인은 음식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피자 두 판에 파스타도 둘이니 초등학생이 포함된 4인 가족에게는 다소 많다고 할 수 있는 주문량인데 그 많던 음식이 경쟁적으로 각 가족 구성원의 구강으로 투하되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은 뒤끝도 깔끔해서 잇새에 낀 음식물조차 위화감 대신 친근감이 느껴질 정도다.

요즘 바람직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SNS에 올릴 사진도 확보했겠다 미각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친 우리는 포만감과 만족감이 어우러진 여운 속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만화카페로 이동했다. 부모와의 동반 외출을 귀찮아하는 두 딸을 꼬드기기 위해 만화카페에서 세 시간 머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벌집 모양으로 늘어선 팔각형 공간 중에서 적당한 위치를 선택해 두 딸은 위층, 우리 부부는 아래층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닮아 오타쿠 기질이 다분한 둘째는 만화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장송의 프리렌>을 검색하더니 없다고 아쉬워하며 대체재로 <원펀맨>을 들고 온다. 사춘기 뿜뿜 첫째는 슬그머니 <여신강림>을 읽고 있다.

이곳에는 만화책뿐만 아니라 보드게임, 발마사지기, 게임기 등 별의별 게 다 있는데 눈치 백단 남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일단 발마사지기부터 챙겨와 아내 다리 쪽에 대령했다. 아내는 <극한견주>를 읽으며 발마시지기를 사용하다가 술기운으로 이내 잠들고, 옆에서 만화책을 이것저것 뒤적이던 나 또한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수면 모드로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에서 깨어나 위층 아이들을 살펴보니 여전히 만화책 삼매경이다. 낮술 때문인지 약간의 두통이 올라온다. SNS에 올리려고 만화카페 내부 사진을 찍고 잠시 멍하니 있었는데 금세 시간이 다 되어 이용료를 계산하고 나왔다. 교보문고 본점에서 문구류를 구경하고 싶다는 첫째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있어 광화문 방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중이었다.

은수저를 가져가 현금화했던 금은방 가게를 지나가는 참이었는데 종로 거리 곳곳마다 외국인이 눈에 띈다. 우리 가족은 혓바닥만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는데 저들은 오체 전부를 이끌고 이곳에 왔구나. 부럽다. 그나저나 막걸리에 파전, 소주에 닭똥집은 영접했으려나?

교보문고에서 첫째의 문구 삼매경을 한참 기다리다 보니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린다. 온 가족이 근처 낙지집에서 저녁을 먹고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왔지만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딱히 일정이 없어서인지 마음만은 편안하다. 허겁지겁 먹느라 낙지 사진은 깜빡하고 찍지 못했구나. 그나저나 낮에 그렇게 잤는데도 밤잠은 또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눕자마자 잠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고 지식과 기억을 활자로 바꿔 생계를 유지해야 할 작가의 시간, 즉 마감이 다가왔다. 한참을 낑낑대며 글을 쓰다가 불현듯 그날의 사진을 SNS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시간 부자로서의 삶을 과시하겠다고 그렇게나 벼렸는데 왜 잊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포만감'이라는 단어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더라도 뱃속이 이미 음식물로 가득 찼다면 집어먹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날 피자집, 만화카페, 문구점, 낙지집에서 가족과 보낸 소소한 시간이 쌓이니 (행복을 소화하는 위장 크기가 작아서인지) 하루 행복 필요량을 훌쩍 넘어버렸고 그 포만감으로 인해 사진 올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굳이 타인에게 전시하고 인정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전보다 SNS 사용량이 확 줄었는데 어쩌면 내가 요즘 바람직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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