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 덩치 큰 형" 감독 봉준호 탄생시킨 '노란문' 빛 본다
봉준호 대학시절 활동한 영화연구소
멤버 이혁래 감독 90년대 시네필 주목
2000년대 초 세계무대에서 한국영화는 ‘사건’처럼 등장했다. 유수 국제영화제에서 각광받는 한국 감독들이 쏟아져 나왔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을 차지했다. ‘도대체 한국영화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외신들이 물을 때마다 그는 연세대 시절 활동한 영화연구소 ‘노란문’을 언급했다. “우리가 시네필 첫 세대다. 영화 공부하고 감독이 된 시네필들이 영화산업에 진출한 최초 사례”라면서다. 지난 27일 넷플릭스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에서 그는 이런 발언을 덧붙인다. “이렇게 말해주면 기사 정리하기가 쉬운가 봐….”
다큐에서 노란문과 1990년대 초 시네필 문화를 조명한 이혁래 감독은 24일 인터뷰에서 “내가 이 영화를 만들 때 가졌던 태도가 봉 감독의 마지막 말에 있다”며 “지금의 한국영화가 이룬 것들에 대해 각자 나름의 원인을 찾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라고 얘기하는 건 위험하다. 많은 우연과 여러 조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연구소 노란문이 좋았던 건 뚜렷한 성과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잊힐 수 있었던 당시의 사소한 경험을 모으다 보니까 30년 만에 가치를 발견하게 됐다”고 했다.
봉준호 배출 노란문 잊힐뻔…30년 만에 빛 봐
“연출 분과라곤 하지만 (장비가 없어) 콘티만 그리다 말았”고, 보고 싶은 작품을 어렵게 복제해 구한 노란문 비디오 목록을 집착에 가깝게 관리하며, ‘대부’ 같은 걸작들을 장면별 해부했던 “곱슬머리 덩치 큰 형” 봉준호가 오늘에 이른 것처럼 말이다. 이 감독이 1992년 서울대 미학과 1학년 때, 서울 마포구 서교동 노란문 공간에 찾아갔을 때 전지에 자로 잰 듯 가지런한 선을 긋고 있던 대학생 봉준호가 이러더란다. "볼펜으로 선을 긋다가 계속 엄지손가락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이러더군요. ‘왜 손톱 밑에서 똥냄새가 나지?’ 인상적이고도 기괴했어요.”
영화과 대학원생이 등록금 빼서 만든 영화연구소
이 감독은 “정지우 감독을 비롯해 90년대 중반 ‘청년’에서 만든 단편들은 수준을 빼어났다. 김성수 감독의 단편 ‘비명도시’의 기술 수준도 충격이었다”고 돌이키며 “어떤 영화를 튼다, 소문을 돌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찾아다녔다”고 했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 이야기만 하고 싶었던 그 시절 노란문이 그런 곳이었다”고 했다.
“87년 6월 항쟁이 끝난 이후, 너무 버거운 짐을 지고 있던 20대가 그 짐을 탁 내려놨을 때였죠. 후련하기보다 뭘 해야 하지, 갈피를 못 잡던 시기죠. 87년 이후로 많은 개방이 이뤄지잖아요.”
민주항쟁 내려놓은 20대, 문화 개방 세례
다큐에도 나온 영화평론가 김홍준(한국영상자료원장)‧정성일 등 1세대 시네필이 프랑스‧독일 문화원이 상영하는 고전 걸작을 흡수했다면, 90년대 초엔 비디오 데크로 원하는 장면을 원하는 만큼 돌려보며 직접 찍어보려는 세대가 나타났다. 제작 현장을 알게 해줄 자료가 드물었던 때라 알아서 논쟁하고 직접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감독은 “그때 헤매는 과정에서 뛰어난 감독이 많이 생겨났다. 정규 과정을 거쳐 공부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영화들이 나왔을 것”이라 했다.
노란문과 가까웠던 배우 안내상‧우현 등 당시 관객은 10명 남짓. 이후 DVD로만 묻혀있던 이 작품은 노란문에서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다. 봉 감독의 연출 데뷔 시점을 지금껏 알려진 단편 ‘백색인’(1994)보다 2년 앞당겼다. 노란문은 93년 잡지 형태의 연구자료집을 냈지만 제1호가 마지막 호가 됐다.
"봉준호 미끼로 30년 전 시네필 끌어올려"
이 감독은 "다큐를 미리 본 봉 감독이 ‘우리끼리만 보고 좋아할 영화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완성된 걸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재미 있어 하겠다’더라”고 했다. “무언가를 몹시 좋아해서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죠.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인생에 아무 도움 안 되지만 목적의식 없이 진정으로 즐기는 일은 30년 전만이 아니라 지금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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