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지왕' 주성치가 표한 존경심, 역사가 됐다

양형석 2023. 10. 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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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주성치가 1인4역 맡은 코믹 무협영화 <쿵푸허슬>

[양형석 기자]

지금이야 따로 부연설명이나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북미에서만 53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이는 당연히 역대 북미개봉 한국영화 중 흥행 1위의 성적일 뿐 아니라 역대 북미개봉 비영어 영화 흥행순위에서도 <와호장룡>과 <인생은 아름다워>,<영웅>에 이어 4위에 올라있다. 그만큼 <기생충>은 북미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비영어 영화라는 뜻이다.

하지만 국내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가 제작한 <기생충>은 처음부터 북미흥행을 노리고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다. 실제로 <기생충>은 북미에서 작은 규모의 배급사가 판권을 취득해 제한적 상영으로 개봉했다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4관왕으로 화제가 되면서 상영관이 크게 늘어났다. 만약 <기생충>이 해외 영화제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면 상영관의 한계 때문에 북미 관객들에게 크게 주목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들이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면서 개봉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생충>처럼 잘 만들어진 영화들은 제한상영으로 선보였다가 뒤늦게 세계 최고의 시장인 북미에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경우가 있다. 90년대 홍콩영화 최고의 코미디배우로 군림하던 주성치 역시 2004년 자신의 꿈을 집대성한 이 영화로 북미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주성치가 감독과 주연,제작,각본을 도맡아 했던 코믹 무협영화 <쿵푸허슬>이다.
 
 <쿵푸허슬>은 북미에서 제한상영으로 시작해 1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
 
1978~80년대 액션배우들 대거 출연

영화에서 감독이 타 작품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모방을 통해 핵심요소나 표현방식을 흉내 내거나 인용하는 것을 '오마주'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소룡 키드'로 자라 각종 무협영화를 보면서 성장한 주성치 역시 <쿵푸허슬>을 통해 과거의 무협영화들을 오마주한 것을 넘어 그 시절에 활약했던 선배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해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쿵푸허슬>에서 '왕년의 액션배우'들을 대거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야수'로 불리는 <쿵푸허슬>의 최종빌런 화운사신은 강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절세고수로 더는 자신의 적수가 없다는 사실에 지루함을 느껴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했다가 각성한 싱(주성치 분)과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화운사신을 연기한 배우 양소룡은 전성기 시절 이소룡,성룡과 함께 '홍콩의 3룡'으로 불리던 전설적인 액션배우로 1990년대 이후 10년 넘게 영화계를 떠나 있다가 <쿵푸허슬>을 통해 오랜만에 복귀했다.

돼지촌의 안방마님이자 '사자후'라는 엄청난 기술을 가진 소용녀 역의 여성 액션배우 원추는 10살 때부터 무술을 수련한 액션배우다. 1975년에는 고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5년 결혼과 함께 은퇴했던 원추는 20년 가까이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활하다 주성치의 삼고초려 끝에 <쿵푸허슬>로 복귀했고 <쿵푸허슬>을 계기로 현재까지 꾸준히 배우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성질이 사납고 권위적인 성격의 아내와 달리 유들유들하고 주책 맞은 돼지촌의 또 다른 주인 양과를 연기한 원화 역시 전성기 시절 '인간 와이어'로 불렸을 만큼 아크로바틱한 스턴트 연기에 특화된 액션배우다. <쿵푸허슬>에서는 아내에게 매 맞고 사는 불쌍한 남편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양과 역시 엄청난 무공을 숨기고 있는 태극권의 고수다. 원화는 홍금보와 원표,성룡 등이 속한 중국희극학교 '칠소복'의 맏형이다.

<쿵푸허슬>에서는 돼지촌 주인 내외 외에도 강호를 떠나 무공을 숨기고 돼지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달인들이 있다. 분식가게를 운영하는 곤봉의 달인 유작귀(동지화 분)와 양복점을 운영하는 홍가권의 고수 재봉승(조지릉 분), 그리고 쌀배달 짐꾼으로 살아가는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 고력강이 그 주인공이다. 그 중 실제 소림사 승려 출신이라는 이색경력을 가진 고력강 역의 석행우는 견자단과 함께 <도화선>,<엽문> 등에 출연했다.

주성치식 유머와 정통무협액션의 만남
 
 <쿵푸허슬>은 '홍콩의 희극지왕' 주성치에게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게 해준 영화였다.
ⓒ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
 
90년대 중반부터 <007북경특급>, <식신> 등의 공동감독에 이름을 올리며 연출을 시작한 주성치는 2001년 <소림축구>를 통해 처음으로 단독연출을 맡았다. <소림축구>는 주인공 아성이 쿵푸를 이용해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영화가 아닌 축구를 통해 쿵푸의 우수성을 알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만큼 주성치가 <소림축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축구가 아닌 자신이 어릴 적부터 많은 관심을 가졌던 '쿵푸'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성치는 3년 후 야심작 <쿵푸허슬>을 통해 제대로 된 무협영화를 만들었다. <쿵푸허슬>은 개봉과 동시에 <소림축구>가 가지고 있던 홍콩영화 오프닝 신기록을 새로 썼고 외국어 영화임에도 북미에서 1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세계적으로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올린 <쿵푸허슬>은 국내에서도 2005년1월에 개봉해 96만 관객을 모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70~80년대 홍콩 영화의 주류였던 무협영화를 주성치 스타일로 재해석한 <쿵푸허슬>은 주성치 특유의 만화적 유머코드와 정통무협의 스토리와 화려한 액션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특히 주성치가 연출과 함께 주연까지 맡았음에도 주성치의 원맨쇼로 채워지는 1990년대의 영화들과 달리 영화 중반까지 주성치는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쿵푸허슬>은 레전드 액션배우들에 대한 예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뜻이다.

<쿵푸허슬>의 주인공 싱은 중반까지는 나약하고 한심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후반부에 혈이 뚫리고 각성하면서 최종보스 화운사신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 그런 점에서 싱은 1990년대 초반 주성치의 코믹무협영화 <무장원 소걸아>의 주인공 아찬과 상당히 닮은 캐릭터다. 특히 싱이 어린 시절 거지에게 구입한 '여래신장 입문서'를 통해 익힌 기술을 화운사신에게 시전하는 장면은 <무장원 소걸아>의 필살기 '황룡 18장'을 연상케 한다. 

<쿵푸허슬>이 홍콩영화의 온갖 흥행기록을 갈아 치우며 크게 성공하자 관객들은 속편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주성치는 2008년 차기작으로 가족 코미디 영화 <장강 7호>를 선보였다. <장강7호>는 주성치가 주연배우로 출연한 마지막 작품으로 이후엔 연기보다 연출에 집중했다. 참고로 2020년 <쿵푸허슬2>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는 원제가 <화운사신지수라면구>로 출연배우 일부만 겹칠 뿐 <쿵푸허슬>과는 무관한 영화다.

대사 한 마디 없이 관객들 사로잡은 히로인
 
 황성의는 <쿵푸허슬>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많은 남성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
 
<쿵푸허슬>은 주성치가 1970~80년대 액션배우들을 주요배역으로 캐스팅했지만 소위 '주성치 사단'으로 불리는 익숙한 얼굴들도 많이 출연했다. 돼지촌에 여러 킬러들을 보냈다가 화운사신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도끼파 보스 역은 <소림축구>에서 이소룡을 연상케 하는 골키퍼 사사형을 연기했던 진국곤이 맡았다. 도끼파 보스의 오른팔 전계문과 싱의 친구 임자총 역시 <소림축구>에서 주성치와 인연을 맺었던 배우다.

주성치는 1990년대 홍콩 최고의 흥행배우답게 장민과 공리, 장만옥, 매염방, 구숙정, 원영의, 막문위, 주인, 장백지 등 어지간한 홍콩의 스타 여성배우들과 모두 연기호흡을 맞춘 바 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검증된 스타배우보다는 신예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림축구>의 조미에 이어 <쿵푸허슬>에서 '주성치의 그녀'로 낙점된 배우는 바로 300:1의 경쟁률을 뚫고 주성치가 직접 캐스팅한 황성의였다.

<쿵푸허슬>에서 불량소년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싱에게 막대사탕을 건네면서 싱에게 호감을 갖는 아방은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 장애인으로 실제 황성의는 극 중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황성의의 신비한 매력을 극대화했고 <쿵푸허슬> 개봉 이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결혼 후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황성의는 2010년대 중반부터 활동이 급격히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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