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는 '백패킹의 성지'가 아닙니다

안사을 2023. 10. 2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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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 최우선... 무리하지 않고 펜션에서 자고 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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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을 기자]

혹자는 울릉도를 '백패킹의 성지'라고 표현한다. 백패킹은 배낭여행 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만, 낮과 밤을 보낼 수 있는 짐을 포함해야 한다는 관용적 의미가 내포되어있어 '배낭 비박 여행' 정도로 그 뜻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보통 '성지'로 표현되는 백패킹 여행지는 곳곳에 비박을 할 수 있는 곳이 적당히 분포되어 있고, 경치가 좋아 야외에서 잠을 잘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울릉도는 결코 백패킹 성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비박 행위가 주민들과 관광객의 불편을 야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경관이 아름다워 자연 속에서 밤을 보내고자 하는 욕심이 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만, 오히려 그 낭만을 자제해야 하는 거친 섬이었다.

복구가 덜 된 산사태 지역

앞선 기사에서 세 번째 고생까지 이야기했다. 첫 번째 고생은 예보조차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 고생은 엄청난 오르막, 세 번째는 충전기 고장으로 60kg에 육박하는 자전거와 짐을 순수 인력으로 끌어야 했던 이야기였다. 마지막은 최근 발생한 현포리의 산사태와 관련이 있다.

첫날 밤(9월 29일)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안전한 잠자리를 택해서 편안한 밤을 보냈다. 태하항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낙석과 파도의 위험이 없는 곳을 고르다 보니 마을 내부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미리 숙영지를 꾸린 바이크 여행객들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허락을 구했다고 했다.
 
▲ 태하의 노을 노을에서 가을이 느껴졌다.
ⓒ 안사을
 
모노레일 탑승 가능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지만, 노을이 진해지는 하늘색에 이끌려 해안 산책로로 향했다. 아직 산에서 찾을 수 없었던 가을의 색이 바다와 하늘에 가 있었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들은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며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동네에서 저녁을 사 먹고 이웃 텐트의 장작 냄새를 '코동냥' 하면서 금세 서늘해진 밤공기를 즐겼다. 도란거리는 아저씨들의 말소리가 자장가처럼 달콤했다. 텐트 바닥에 눕자마자 지구 반대편으로 스며들 듯 잠에 빠져들었다. 텐트가 흔들리는 강한 바람에 눈을 뜨자 어느새 아침이었다.
   
▲ 모닝 커피와 독서 첫날 비 때문에 못 가졌던 커피타임을 가졌다.
ⓒ 안사을
서둘러 짐을 꾸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언제 배터리가 방전될지 모르니 되도록 전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페달을 굴렸다. 시속 10km 정도나 나올까 하는 속도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래도 언덕 하나만 넘어가면 저동까지는 쭉 평탄한 길이므로 마음이 가벼웠다.
전날 겪었던 오르막에 비해 태하에서 현포로 넘어가는 일주도로는 매우 순하고 부드러웠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 거리가 꽤 되었지만, 긴 만큼 경사가 완만했다. 언덕의 정점에 있었던 영농조합에서 파도처럼 놓여 있는 늙은 호박의 자태를 보며 웃기도 하고 호박엿도 하나 얻어먹었다.
 
▲ 울릉도 호박 늙은 호박이 이렇게 많이 놓여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 안사을
   
▲ 현포 가는 길 노인봉과 송곳봉이 보인다. 현포 전망대는 공사중. 드디어 여기서부터 편한 길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 안사을
 
그런데 현포에서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맞닥뜨렸다. 얼마 전 산사태가 크게 난 지역이 아직 복구되지 않고 있었다. 기사로 접했을 때는 3~4일이면 복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6일째였던 당시에도 공사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어떤 고생을 해 가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자 우리를 막아섰던 안내자가 말씀하셨다.

"사람은 지나갈 수 있어요. 걸어서 다니는 것은 지금 허용하고 있어요."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금 자전거에 짐차가 달려있잖습니까. 등산하는 것처럼 사람만 지나간다니까요."
"자전거를 들고는 못 가나요?"
"당연히 자전거는 들고 갈 수 있죠. 그런데 저 수레를 어떻게 들고 갈라 하나."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면 짐을 하나씩 다 꺼내서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번 왕복하는 것이 배터리 없이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자리에서 자전거와 달구지를 분리하고 안에 있는 짐을 꺼내어 소분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라 일터에 방해도 되지 않았다. 또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무사히 해당 구간을 통과했다. 다시 짐을 꾸리고 짐칸을 자전거에 연결했다.
 
▲ 산사태 복구 현장 사람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놓은 상태였다. 촬영자 뒤편으로 길이 있었다.
ⓒ 안사을
울릉도는 그래도 아름다웠다

현포에서 추산항까지는 금방이었다. 굶주린 배를 물회로 채우고 나리분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봉우리 하나를 찍고 오고 싶었다.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성인봉은 무리였고 송곳봉이 슬며시 내려다보이는 깃대봉이 적당한 목적지였다. 아직은 가을 냄새가 찾아오지 않은 숲을 지나 탁 트인 메밀밭을 만났다. 마침 메밀꽃이 한창이었다.

나리분지 종점에서 깃대봉을 왕복하는 길은 두 시간 반이면 충분했다. 알봉, 성인봉, 대풍감 등 짧은 여행 가운데 가보지 못한 곳들이 많지만 깃대봉 전망대에서의 풍경이 마음을 충분히 시원하게 해주었다.
 
▲ 나리분지 메밀밭 마침 만발했던 메밀꽃
ⓒ 안사을
   
▲ 깃대봉의 서편 저 멀리 대풍감이 보인다
ⓒ 안사을
   
▲ 깃대봉의 북쪽 송곳봉과 바다
ⓒ 안사을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자 실수로 필름카메라를 놓고 온 사실이 어쩌면 우리에게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방과 삼각대 무게까지 더하면 7kg은 족히 무게가 더해졌을 것이고, 이러한 생고생 가운데 손이 많이 가는 필름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둘째 날 밤 우리는 결국 잘 곳을 찾지 못했다. 여정 상 산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해변의 잘 곳은 언제 파도에 실려 갈 줄 모를 정도로 바다와 지척이었다. 저동과 도동은 주민과 관광객이 많아 공터나 정자에 텐트를 치는 것은 누가 봐도 민폐였다.

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근처 숙소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이 황금연휴에 첫 번째 전화한 숙소에 방이 있었다. 게다가 정말 친절한 주인장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자전거와 달구지를 밖에 놓는 것이 불안하셨는지 옆집까지 동원해서 우리의 짐을 안전히 맡아주시기까지 했다. 추천받은 음식은 정말 맛집이었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적절했다. 빗줄기도, 충전기도, 배터리도, 찾기 힘들었던 잠자리도 말이다. 여행은 그 순간의 행복함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면서 그와 동시에 미래에 간직하게 될 추억을 생산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을 즐겼으니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것이요, 길이 기억할 멋진 순간들이 남았으니 두 번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 울릉도를 떠나며 이번 여행에서의 경험을 통해 다음 방문 때 어떻게 채비할 것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 안사을
 
끝으로, 가슴 졸였던 순간을 이야기하자면 본 여행 중 거북바위가 무너진 사건이었다. 항구에서 섬을 돌면서 첫 번째로 만난 야영 후보지였는데 우리는 거북바위 주변의 상황을 보고 별 고민도 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학포 해변에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수면과 너무 가까웠고 낙석의 위험 또한 커보였다.

소식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우리가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울릉도는 백패킹의 성지가 아니다. 낭만적인 여행기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거칠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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