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요정'도 피하지 못한 울릉도의 비, 더 심각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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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을 기자]
이십 대 초반부터 꾸준히 필름 사진을 찍어오고 있었다. 본지에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이용한 여행 기사도 심심찮게 올렸다. 필름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가, 길고 먼 여행길에 오르면서 다시 필름을 챙기기 시작했다. 네팔 여행이었고 키르기스스탄 여정이었다.
▲ 나리분지에서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눈부신 하늘을 보여준 울릉도 |
ⓒ 안사을 |
그런데 울릉도 이야기를 연재에 싣지 못하고 '사는 이야기'에 글을 써 내려가는 이유는 시쳇말로 웃프다. 의욕적으로 가장 큰 카메라와 중형필름을 무려 하드케이스에 잘 싸놓은 채 보기 좋게 거실 한복판에 놓고 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샛노란 케이스가 머쓱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 망각 사건은 이번 여행에서 일어날 몇몇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 달 치 땀을 며칠 만에 다 쏟다시피 했고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파란 하늘은 울릉도의 기암괴석을 선명하게 만드는 바탕색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달구지 연결한 자전거를 끌고 울릉도로
추석과 주말, 개천절이 징검다리 휴일로 연결된 역대급 휴가를 맞이하여 울릉도로 향했다. 추석 전날인 목요일에 일찌감치 성묘를 마쳤고 명절 당일 부모님께 용돈과 함께 인사를 드렸다. 불과 1년 전 결혼해 세대를 분리해 한동네에 살지만, 한 해에 몇 차례 이렇게 새삼스럽게 만나는 것도 탄탄한 가족애를 돋우는 데에 도움이 된다.
포항 영일만에서 밤 11시 50분에 출항하는 울릉크루즈를 예약해 두었다. 제주도를 갈 때도 항상 여수에서 골드스텔라를 이용한다. 두 배 모두 아침 7시쯤에 목적지에 도착하므로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배에서 잠을 설치거나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단히 피곤한 여정이다.
▲ 한가득 전주에서 포항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던 짐들 |
ⓒ 안사을 |
▲ 울릉크루즈와 자전거 바구니와 짐받이, 달구지까지 모든 짐을 나에게 실었다. 모터와 배터리 성능이 더 좋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를 괴롭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안사을 |
울릉도에는 세 곳의 공식적인 야영장이 있다. 그중 두 곳은 유료이고 나머지 한 곳은 무료이다. 두 곳의 유료 야영장 중 한 곳은 예약이 가능하고 나머지 한 곳은 선착순으로 자리를 정하게 된다. 무료 야영장 역시 먼저 맡는 사람이 임자다. 결국 주말이나 연휴에는 세 곳 다 자리를 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보면 된다.
예약이 가능한 유료 야영장인 국민여가캠핑장(남서리)은 진즉에 예약이 찼다. 배가 울릉도에 정박하자마자 두 곳 야영장으로 신속하게 이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야영장 모두 우리의 인연은 아니었다. 타인의 과자 봉지를 쳐다보는 세 살배기 아이의 눈빛으로, 이미 자리 잡은 다른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첫 번째 고생 단잠을 자고 갑판으로 나왔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과 하루 전 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
ⓒ 안사을 |
직장에서 나의 별명 중 하나는 '날씨 요정'이다. 나들이든 출장이든 나와 함께 있으면 일기예보가 바뀌면서까지 화창한 날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나는 좋은 날씨를 몰고 다닌다. 설악산 대청봉 세 번, 한라산 백록담 세 번을 갈 동안 안개도, 구름도 없었다. 나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또한 단 한 번 만에 성공한 사람이다.
이런 날씨 요정마저도 울릉도의 '비님'은 이길 수 없었나 보다. 불과 하루 전 예보에도 없던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첫 번째 계획한 여정이 해변에서 핸드드립으로 모닝커피를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를 피할 곳도 생각해 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예기치 않은 비를 만나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욱 망연자실했다.
갑자기 내린 비에 항구 근처 두 곳의 편의점은 진즉 우산이 동났다. 비옷마저도 못살 줄 알았는데 두 번째 가본 편의점에서 마지막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동행인이 배에서 내릴 때 발 빠르게 청소하시는 직원에게 부탁해 받아낸 커다란 비닐 덕분에 달구지와 가방 속 짐들도 다행히 지켜낼 수 있었다.
둘째 날 오후에도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위기를 겪었기에 자신만만하게 비 맞을 준비를 단단히 했다. 달구지 속 짐들을 모두 비닐로 꼼꼼히 쌌고 비를 맞아도 되는 물건들만 자전거 짐받이에 실었다. 그런데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울릉도의 날씨에 두 번째로 보기 좋게 당한 셈이었다.
두 번째 고생 : 뜻하지 않은 근력 운동
분명히 인터넷 수기에서는 "전기 자전거로도 오르기 힘든 오르막이 딱 두 군데 있습니다"라고 나와 있었다. '오를 수 없는'이 아니라 '오르기 힘든'이었고, 딱 두 군데라면 밀고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단연코 주장하건대, 그 블로거는 내가 갔던 길로 안 갔을 거다.
첫 밤을 보낼 곳을 찾을 겸 울릉도를 시계 방향으로 훑기로 했다. 사동항에서 출발하여 거북바위를 거쳐 남서리, 태하리를 지나 현포리까지 가면 울릉도의 서편을 돌게 된다. 학포 야영장(선착순 유료 캠프장)의 자리는 애당초 포기하고 남서리의 무료 야영장으로 향했다.
▲ 남서 모노레일 비가 개고 점차 싱그러워지는 중 |
ⓒ 안사을 |
▲ 남서 전망대에서 본 해안도로 과거 길이 나지 않았을 때,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이 언덕을 넘어다녔다고 한다. |
ⓒ 안사을 |
문제는 얼마 후 발생했다. 남서 야영장의 자리가 혹시 나지 않을까 살펴보던 중 울릉도의 내공이 가득해 보이는 한 아저씨께서 우리에게 조언해 주셨다.
"여기 자리 안 날 거예요. 나는 학포에서 2박 하고 여기로 옮겼는데, 여기 사람들 오늘은 다들 안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런가요? 어쩔 수 없지요. 학포 야영장은 어차피 자리 없을 것 같고 해양연구소 앞에서 야영이 가능하다던데요."
"거기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너무 좁아서 별로예요. 차라리 학포 해변으로 가세요. 거기는 샤워장도 열려있어요."
"야영장 말고 해변 말씀이신 거죠? 해변에 텐트를 칠 수 있나요?"
"방파제 근처나 해변에서 야영할 수 있어요."
반가운 마음에 학포로 향했다. 순환도로를 벗어나 학포로로 내려가자마자 엄청난 경사의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다시 올라올 일이 걱정되었지만 하룻밤을 보내고 쌩쌩한 체력으로 오르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학포 해변은 절대 야영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 학포해변(도로뷰) 야영을 하기엔 매우 위험해보이는 곳 |
ⓒ 네이버지도 도로뷰 |
거친 여행을 즐기지만 최대한 안전을 기하는 것이 동행인과 나와의 공통점이다. 마음이 맞으니 싸울 일도 없다. 미련 없이 학포 해변을 떠났다. 그런데 내려올 때 느낀 것보다도 훨씬 암담한 오르막이 우리의 앞을 가렸다. 일종의 벽이 가로막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 오르막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경사가 심하다. 정말 가파른 곳에서는 사진조차 없다. |
ⓒ 안사을 |
계기판에 E-01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모터 출력 이상'을 뜻하는 문자였다. 동행인의 자전거에도 같은 내용의 에러 코드가 떴다. 전원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면서 최대한 스로틀을 덜 쓰고 밀고 올라가는 수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속옷까지 흠뻑 젖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번째 고생 : 배터리 너마저
더 큰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충전기를 챙겨왔기에 배터리 소모는 우리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주인장에게 허락을 맡고 배터리를 충전했는데, 내 충전기의 신호 램프가 잠시 들어왔다가 빛을 잃었다. 어댑터가 고장 난 것이다.
충전기가 고장 날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볼트 하나가 없어서 기계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심정이 이럴까. 정말 우연히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충전기가 딱 고장 난 것인지, 과부하가 걸린 배터리가 원인이 되어 어댑터 회로 중 하나가 끊어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둘째 날 저녁, 배터리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주변은 어두워졌고 불빛도 없이 오르막 도로에서 무념무상으로 육중한 자전거를 밀어 올리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 같아."
"왜? 뭐가?"
"내 자전거에 달구지를 달았고, 내 충전기가 고장난 것 말이야. 차라리 무게가 나한테 집중이 되어있으니까 이렇게 밀고 가지, 분산되어서 둘 다 무겁게 밀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면 답이 안 나왔을 거야."
동행인은 배터리가 충분했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자전거에서 내려 나와 같은 속도로 자전거를 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지 왜 밀고 있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의리가 있지 같이 고생을 해야하지 않겠어?"
- 울릉도 비박 여행에 대한 단상이 후속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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