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부터 압록강까지 '범도의 길' 3천리를 가다
[최진섭 기자]
지난 10월 19~23일 4박 5일 동안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과 함께하는 '범도의 길(두만강-만주-압록강)' 여행에 참여했다.
만주 지역 방문이 처음이었던 나는 '범도의 길'에 따라나서며 만주벌판의 항일무장투쟁 전적지 답사와 함께 두 가지를 더 기대했다. 첫 번째는 신채호 선생이 남긴 "집안현의 고구려 유적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은 것보다 낫다"라는 말을 고구려 유적지 앞에서 실감하고 싶었다.
두 번째는 끊어진 압록강 철교 방문이었다. 남북 사이의 임진강, 한강하구가 아니라 조·중 국경을 관통하는 압록강에서 분단 현실을 목도하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두 가지 끌림을 충족하고도 남는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연길공항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붉은색 바탕에 한자와 한글로 병기된 "여러 민족이 단결진보하고 변강이 번영안정된 소수민족자치주를 건설합시다"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참가자들을 태운 버스는 곧바로 홍범도 부대가 국경을 넘어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던 두만강으로 직진했다. 걸어서도 건너갈 깊이와 넓이의 두만강 너머로 북한의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졌다.
두만강을 따라 달리고 달리던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이 벌어진 삼툰자의 일광산 아래였다. <범도>에는 여기서 벌어진 전투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격중대와 백두산중대를 이끌고 삼툰자에 도착한 나는 곧장 봉화마루로 올라갔다. 삼툰자를 감싸고 치솟은 일광산에서도 시계가 가장 좋은 봉화마루였다. 백두산 발원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두만강 상류와 경흥으로 빠져나가는 두만강 하류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만강은 말이 없었고, 두고온 내 나라의 유월 하늘은 시리게 푸르렀다."
홍범도 장군이 두만강 너머의 일본군을 굽어보았던 일광산에 올랐다. 조각공원이 조성된 일광산에서 바로 코앞에 펼쳐진 북녘 산천을 조망했다. 공원에 설치된 조각물 중에는 젊은 시절 책으로 접했던 청년영웅 뢰봉(뇌봉)의 흉상도 있어 반가운 마음에 기념사진도 남겼다.
다음은 봉오동. 삼툰자에서 철수하는 독립군을 따라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킨 봉오동전투 전적지 입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봉오동 저수지 아래에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 안무 장군의 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둔 고려령을 멀리 바라보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둘째 날엔 백두산 자락의 늦가을 풍경을 실컷 감상했다. 추운 데서도 잘 자란다는 자작나무, 잎갈나무가 빼곡히 늘어선 그곳엔 이미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후 사나흘 동안 압록강과 함께 북녘 산하의 풍경을 가슴에 깊이 담을 수 있었다.
▲ 고구려 첫 도읍지인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 멀리 보인다. 그 아래 있는 오녀산박물관을 방문했다. |
ⓒ 최진섭 |
4박 5일 일정을 마친 뒤 참가자가 보인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특히 길림성 두만강 일대와 압록강 800㎞의 노정에 푹 빠졌는데, 심지어 여행객 중 여러 명은 올 겨울로 예정된 '2차 범도의 길'에 다시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주와 압록강은 모두에게 예상을 뛰어넘는 매력을 지닌 여행지였다. 이 글에서는 몇몇 참가자의 여행 감상을 통해 그 매력의 일부를 보여주고자 한다.
윤동주 묘지에서 낭독한 '쉽게 쓰여진 시'
북간도 윤동주 묘지 찾아가는 길은 마치도 영화촬영의 한 장면 같았다. 도착 지점 수 킬로미터 전부터는 대형버스가 지나갈 수 없어서, 40여 명의 일행은 용정(현지 표기는 룡정)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4명씩 탑승했다.
▲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 있는 윤동주 묘지를 찾아 술을 따르는 방현석 작가와 필자. 용정시인민정부에서는 ‘룡정시 중점 문화재 보호단위’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다. |
ⓒ 김민정 |
용정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있는 윤동주 묘에 도착한 일행은 꽃다발을 바치고, 술도 한 잔씩 따랐다. 한문 과목 교사로 일하다 정년퇴임 했다는 심규민 선생이 자원해서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용정 윤동주 묘지 앞에서 그의 시 <쉽게 쓰여진 시>를 낭독한 심규민 선생(왼쪽). |
ⓒ 강주원 |
무덤 앞에는 1945년에 세운 '시인윤동주지묘'라 적힌 비석이, 바로 옆에는 '윤동주 묘'라는 이름의 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룡정시 중점 문화재 보호단위'인 이 비를 룡정시 인민정부가 1997년 6월 3일 공표하고, 2014년 7월 15일 세운 것으로 적혀 있었다.
윤동주 <별 헤는 밤>은 중학교 시절 애창 시의 하나였다. 그때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했을 때 '북간도'라는 말은 미지의 나라와도 같았다. 북간도에 와서 그의 무덤을 보니 이제야 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 묘에서 내려오면서 어느새 어둠에 잠긴 용정 시내를 바라보았다. 저 가물거리는 불빛 사이 어딘가에서 봉오동전투에 종군 의사로 참전했던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이 독립군과 가난한 조선동포들을 치료했을 것이다.
<범도>에서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박서양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쟁에 뛰어든 걸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저는 사는 게 날마다 전쟁이었습니다.'
소설 <범도>의 인물들이 떠오르는 길
기나긴 두만강, 압록강을 따라 기행을 하다 보니 버스를 타고 장시간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다. 방현석 작가는 여러 차례 마이크를 잡고 답사할 장소에 관해 즉석 강의를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압록강을 따라 달리던 차 안에서 방현석 작가가 왼쪽 창밖을 보라고 했다.
"저 강 건너편이 삼수갑산 지역입니다."
멀고 멀기만 할 것 같았던 삼수갑산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치고 점령했던 삼수성이 바로 저 강 건너 산 너머 어디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홍범도와 함께 싸웠던 차도선, 태양욱, 진포와 같은 <범도>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정표가 '13도구'에서 '14도구'로 바뀌어갈 때 방 작가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신갈파진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1908년 홍범도 장군이 조국을 등지고 부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 곳이 신갈파진이었다.
방 작가는 압록강 건너 삼수갑산을 바라보며 여행하던 둘째 날,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압록강을 끼고 북녘땅을 바라보며 385Km를 달려 도착한 중강진(중국 지역은 림강), 국경의 밤이 깊다. 내일은 며칠에 한 끼를 겨우 먹으면서 홍범도부대가 갔던 길을 따라 통화로 간다. 주린 배를 견디며 어깨에 총을 메고, 걷고 또 걸었던 그들의 눈물이 베인 길."
신흥무관학교 터를 유심히 살피는 소설가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 1911년 설립)가 처음 자리를 잡았던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왔을 때 보이는 것은 황량한 옥수수밭이었다. 강습소 터 앞에는 예전부터 있었다는 허름한 벽돌공장이 있었다.
왜 이 유명한 항일독립운동 유적지에 안내판이나 기념석 하나 없을까? 함께 간 강주원 박사(인류학과)는 한국인이 이곳을 찾아와서 기념 사진만 찍었을 뿐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을 쓴 김이정 작가는 아무 흔적도 없는 이곳 들판에서 무엇인가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유심히 살펴봤다. 김이정 작가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어느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쓰려고 구상 중"이라고 한다.
"수년 전부터 자료를 모으고 준비 중인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서 만주로 훌쩍 떠나왔어요. 소설을 풀어나가려는 주요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삼원보죠.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지만 그 역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진창인 이 길을 백여 년 전에도 독립운동에 전 재산과 목숨을 바친 이들이 걸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그들이 걸었던 이 길에 발자국을 포개 봅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범도>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방현석 작가는 "3천5백여 명의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간부들이 봉오동, 청산리, 의열단 등 거의 모든 무장투쟁의 주역이었다"라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서로군정서 총사령관 지청천도 바로 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다. 일본육사 26기 출신 동기생 16명 중에 유일하게 일본군을 탈영해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던 지청천은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백두산 안도현 삼림지대로 이동해 홍범도부대와 연합했다.
10여 년 전에도 표지석 하나 없는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방 작가는 "와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질척이는 골목길을 더듬어 여기에 찾아올 재간이 없다"라고 말했다. 신흥강습소 터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누군가 선창해서 함께 외친 구호는 "백발백중", "일격필살"이었다.
▲ 강주원 박사(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가 '압록강 국가급 명승구조감도' 앞에서 답사할 장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 최진섭 |
이번 만주-압록강 기행을 방현석 작가와 함께 기획한 강주원 박사의 저서 중에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2016)가 있다. 나는 이 책을 인천에서 단둥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1편 '압록강에서 북한만 바라보지 말자'를 시작으로 이어진 '오늘 부친 한국 물건, 모레 평양에서 받는다', '단둥, 또 하나의 개성 공단' 등의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 기내식 제공 때문에 책 읽기가 끊긴 게 아쉬웠다.
강 박사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선이 압축되어 있는 글"로 <중앙일보>의 2015년 7월 기획기사 '한국 대표지성 31인의 5박 6일 동행'을 꼽았다.
이 기획기사에는 단둥과 신의주를 비교하는 사진과 함께 "국경은 철조망이다. 장벽이요 단절이다. 접경지역은 동면, 죽음의 땅이 된다"라는 글이 실렸다. 강 박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인 김훈의 고착된 관점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소설가 김훈은 <중앙일보>(2015년 7월 6일 자)에 "생활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분단은 일상의 질서와 정서로 고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안고 돌아왔다"라고 썼다.
강주원 박사는 압록강, 두만강을 이렇게 남북 사이의 휴전선, 분단, 장벽, 단절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도 강 박사는 "압록강은 공존, 공생의 공간"임을 강조했다.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서린 단둥을 다녀간 한국 사람들이 "북한만 바라보고 단절만 이야기하는 것"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압록강, 단둥에서 북쪽만 바라보지 말고 단둥 속에서 사는 남북의 사람도 바라보자는 강 박사의 제안에 따라 4박 5일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단둥 고려거리(조선족거리)로 잡았다.
그곳에서 단둥에는 중국인과 한국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북한 사람도 살고 있음을 직시하라고 했다. 고려거리에는 '상품도매 소매', '한복', '다이소-공장가격'이라는 순한글 간판도 보다.
▲ 조선족이 운영하는 이 쏘가리매운탕 음식점은 강가에 자리 잡았는데, 압록강에서 잡거나 기른 쏘가리로 만든 매운탕이라고 한다. |
ⓒ 최진섭 |
여행을 소개하며 음식이 빠졌다. 점심, 저녁으론 주로 배갈을 곁들인 중국요리였고, 한 마디로 산해진미였다. 그중에 내 입맛에 딱 맞는 별미는 네 번째 날 압록강 바로 옆에 자리한 식당에서 점심으로 먹은 쏘가리 매운탕이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이 음식점에서는 압록강에서 잡거나 기른 쏘가리로 매운탕을 만든다고 한다.
▲ 필자가 탄 버스에는 시인, 소설가, 방송작가, 평론가 등의 예술가가 많았는데, 이들 중 여러 명이 압록강에서 작품을 구상할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유람선에 올라 압록강을 거슬러 오르는 양진오 교수, 김이정 작가, 방현석 작가(오른쪽). |
ⓒ 최진섭 |
이번 만주-압록강 답사 기행 모임에 참석한 사람의 직업과 나이는 <서울의 달>로 유명한 원로방송작가부터 문학평론가인 엄마를 따라온 중학생까지 다양했다. 저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다를 텐데, 압록강의 정취에 반한 참가자가 많았다.
내가 탄 1호 차에는 시인, 소설가, 방송작가, 평론가 등의 예술가가 많았는데, 이들 중 여러 명이 압록강에서 작품을 구상할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창작을 멈춘 지 제법 된다는 한 소설가는 "단둥-신의주의 끊어진 다리 위에서 안개 자욱한 압록강을 바라보며 앞으로 쓸 작품을 구상했다"라고 공언했다.
그러자 희곡작가 한 사람은 "나도 단둥을 무대로 작품을 쓸 것 같은데, 서로 내용이 다른 소설과 연극이 되도록 사전에 조율을 해서 윈윈하자"라고 말해 일행의 웃음을 자아냈다.
여행 마지막 날, 안개 낀 압록강 철교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북에서 단둥으로 철커덕철커덕 소리 내며 넘어오는 26량의 기다란 화물열차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도 했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K씨는 단둥을 떠나 심양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홍범도 장군의 뜻을 기리고 신흥무관학교 기념물 건립을 위한 씨앗자금을 모금하자"라는 제안을 했다. 여행 참가자는 만장일치로 이에 동의했고, 소액이라도 모아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에 전달하기로 했다.
방현석 작가는 이번 겨울에 대련과 뤼순감옥, 만주횡단 열차 탑승 구간을 추가해서 2차, 3차 '범도의 길'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했고, 여러 명이 즉석에서 동참 의사를 밝혔다. 여행 참가자들은 4박 5일의 여행을 돌아보며 각자의 소감을 밝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단둥, 압록강 주변에서 한 달 살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미 숙소도 알아봤다."
"대구에서 '전태일의 친구들'이란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전태일 생가 매입하는 일에 참여했는데, 앞으로 '범도의 친구들' 만들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압록강이 몸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잎갈(이깔)나무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원 없이 봐서 행복했다.'
▲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단교 위에서. 왼쪽부터 평론가 이선우, 희곡작가 김민정, 이선우 씨 중학생 아들 이예준 군, 소설가 김이정. |
ⓒ 최진섭 |
2023년을 사는 여행자들은 살아온 이력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으로 두만강-만주-압록강 길을 답사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100여 년 전 이 길을 누비며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범도>의 인물들은 어떤 심정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하는 점이다.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오직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북만주의 밤이었다.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잠들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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