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가장이 되는 시대, 낯설지만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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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화 기자]
4년 전에 결혼한 내 조카는 아직 아이가 없다. 조카 부부의 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의 그 시절과 사뭇 다르다.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맡아 살림을 꾸려갔던 25년 전의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맞벌이를 하며 생활비는 각각 절반씩 부담해서 산다고 한다. 물론 각자의 수입은 각자가 관리하고 서로가 얼마를 버는지, 또 얼마를 쓰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단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가정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시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을 하시는, 따라서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고 중심인 전통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정이었다. 집안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권력이 가장 큰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독재를 하시거나 강압적이시지는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특별히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음에도 가장으로서 극진히 대우하셨다. 엄마는 하루종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하셨지만,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 식구는 아버지 덕분에 먹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부장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는 결혼 후에는 남편을 가장으로 생각했다. 맞벌이를 하던 시절, 내가 세대주로 되어있어야 직장에서 대출이 가능하다고 해서 잠시 나를 세대주로 올린 적이 있었다.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남편은 마치 가장의 자리를 빼앗긴 듯 은근히 기분 나빠했고, 나는 잘못한 것도 없이 남편의 눈치를 봐야했다.
또, 아이를 낳아 둘 중의 한 사람은 육아를 맡아야만 했을 때 당시 남편보다 직책과 월급이 더 높았는데도 나는 당연히 남편이 아닌 내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집 가장인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담당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책 <가녀장의 시대> |
ⓒ 이야기장수 |
이슬아 작가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서는 가장이 아버지가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딸이다. 무능력하다 못해 가정에 해를 끼치는 아버지들조차도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하는 가부장제와는 다른 형태의 가족 이야기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이 되었어도 가정의 전체적인 그림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이 가정의 모든 결정을 내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 결정을 따른다. 결국에는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집안에서 가장 큰 권한과 권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가부장제와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소설에서 딸이 가장이라는 설정보다 가장이 된 딸이 가정을 운영해 가는 방식에 더 흥미를 느꼈다. 이 소설에서의 가(녀)장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부모에게 월급을 준다. 성공한 딸이 부모에게 드리는 용돈이 아니라 집안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가장이 정당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답습해온 가부장제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작가가 '부모'를 뒤집어 '모부'라는 다소 어색한 단어를 쓴 이유도 집안에서 하는 역할의 중요도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방을 맡고 있는 복희씨(주인공의 엄마)가 여느 가정의 엄마들처럼 매 끼니 식사메뉴를 고민하면서도 항상 유쾌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있기 떄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건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의미이기에 엄마도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랐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점점 변화되어 가는 세상이 흥미롭다. 우리 딸들이 앞으로 살아갈 새 시대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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