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빠트릴거야" 그녀의 외침... 거슬리지만 통쾌하다
[윤일희 기자]
▲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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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쎈 여자'들을 동경했다. 가장 먼저 흠모했던 '힘 쎈 여자'는 세미 사이보그 '소머즈'였다. '으드드드' 하는 효과음이 나면 괴력 발산 타이밍이다. 그 소리에 얼마나 전율했던지. 다음은 슈퍼 헤로인 '원더우먼'이었다. 갤 가돗의 영화 <원더우먼>의 효시가 된 1970년대 미국 드라마 주인공 '원더우먼'을 말한다. 저 세상 외모로 뿜어내는 괴력은 내 어린 넋을 빼놓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여자는 참해야 한다는 가부장의 주문을 은밀히 내팽개치고 있었다.
그런들 뭐 하나. 결혼, 출산, 양육, 끝없는 돌봄으로 점철된 내 인생은 만성 피로로 '힘 쎈 여자'는 커녕 힘 있는 여자와도 멀어졌다. 그렇게 잊고 있던 '힘 쎈 여자'가 재소환된 건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을 통해서였다. 작고 여리고 귀여운 젊은 여자가 괴력을 주체하지 못해 고군분투하는 드라마였다.
'힘 쎈 여자'를 동경하는 정체성에 스위치가 다시 켜졌다. 힘 자랑하는 악당들을 한 방에 혼내주는 도봉순(박보영 분)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다 도봉순이 연애에 돌입하며 내 사랑은 빠르게 식었다. 내 영웅이 가부장을 수호하는 이성애 질서로 회귀했기 때문이었다.
오, 그런데 도봉순을 고순도 업그레이드한 슈퍼 버전 '힘 쎈 여자'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힘쎈여자 강남순>이다. 강남순(이유미 분)은 괴력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슈퍼파워다. 할머니부터 엄마까지 괴력의 소유자며, 어마어마한 힘으로 업계를 평정하고 자수성가한 걸출한 인물들이다.
도봉순의 엄마가 대물림한 자신의 괴력을 부끄러워하고 저주한 반면, 남순 가의 여자들은 어떤 콤플렉스도 없으며 괴력을 쉬쉬하지도 않는다. 애초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가부장의 질서 자체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대항하며 깨부수는 전략이 아니라, 아예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낙후시키는 고단수 젠더 전복 전략이랄까. 조금 더 오버해 보자면, <이갈리아의 딸들>이 구현한 젠더 전복이라는 전제를 현대 한국에 코믹하게 이전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설정 아래 드라마는 2017년 도봉순이 겪은 내면의 젠더 갈등 자체를 옛이야기로 만들면서 곧바로 2023년 '힘 쎈 여자'가 나아갈 길로 진입한다. "세상을 구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영웅으로서의 활약을 정의롭게 수행하려고 한다.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슈퍼파워들이 권력에 이용당하며 위기를 통해 영웅으로 처절하게 거듭났다면(무빙의 초능력자들은 모두 착하고 의롭지만 남초 성비는 문제적이다), 남순 가의 초능력자들은 타고난 괴력이 이용당할 위험한 무엇이라거나 숨겨야 할 무엇이란 전제 자체를 지우고 나아간다. 능력을 드러냄에 두려움이 없고 이를 활용해 거머쥔 재력으로 영웅 되기를 실현한다.
해서 남순이 부모를 잃고 몽골에서 자란 유년의 과정이나, 성인이 되어 부모를 찾아 혈혈단신 한국에 입국해 부모를 상봉하는 과정은 최소화한다. 바로 세상의 재난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는 미션에 돌입한다. 모녀 상봉조차 기존의 눈물 콧물 빼는 진부한 재회가 아니라,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는 영웅 수행으로 대체한다.
▲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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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쎈여자 강남순>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단연 성 역할의 미러링일 것이다. 남순 가의 어떤 여자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여자답지 않다. 돈벌이 생계부양자 역할도 여자들이 맡는다. 남자들은 집안일만 잘하면 된다. 후대를 잇는 소임도 남순 가 여자들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것도 반드시 딸을 낳아야 초능력을 물려줄 수 있기에 심기일전한다. 금주(김정은 분)가 출장 나온 참한 은행원 봉구(이승준 분)를 배우자로 낙점해 빠르게 결혼한 것도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남순 또한 여자라 애정 표현을 못 하고 애를 태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희식(옹성우 분)에게 "잘생겼다"며 애정이 뚝뚝 흐르는 눈길을 거침없이 보낸다. 조모 중간(김해숙 분)은 어떤가. 부부간의 금술을 누려본 적 없는 중간은 인생 남자를 만나 거침없이 대시한다. "자빠뜨릴 거야"라는 말은 일면 거슬리지만, 이는 거친 성적 욕망 표출의 완전한 미러링이 아닌가.
이처럼 남순 가의 여자들은 자신들의 애정이나 욕구를 표출함에 있어 가부장의 질서를 깡그리 무시한다. 아니 아예 그 질서 자체가 없는 젠더 아노미는 남순 가의 여자들을 통해 대담히 재현되며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아마도 특히 여성에게).
▲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스틸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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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 가의 남다른 삶의 지향은 잃어버린 딸 남순을 만난 후 가짜로 딸 행세를 했던 화자(최희진 분)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올돌하게 드러난다. 조선족 출신의 화자가 아직 젊은 나이에 사기 범죄를 저지르며 살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연("돈이 없으면 나쁜 짓을 하게 돼")이 있으리라 짐작한 때문이다. 내 딸만 찾았으면 됐다는 혈연 중심적 사고를 탈각하고, "나는 죽어도 아무도 안 찾겠지"라 비탄하는 화자의 고립과 소외를 껴안는다. 남순에게 딸 자리를 빼앗겨 분기탱천한 화자가 어떻게 독기를 해독하고 남순 가의 여자들과 관계 맺게 될지 궁금하다.
드라마의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미진함도 있다. 고액의 돈을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안기는 금주의 돈을 쓰는 태도나 과소비하는 남순 가의 지향, 아직 확실치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즈 혹은 범죄와의 전쟁 등과 어느 정도 타협해 나갈지 미지수다. <원더우먼>과 <블랙 위도우>의 영웅다움을 멋지게 왔다 갔다 하는 금주의 코스프레는 매력적이지만, 부자와 영웅의 길이 한 방향이긴 어렵다. 돈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버린 세상에서, 남순 가의 영웅 되기는 어떻게 다르고 정의롭게 길을 낼지 초미의 관심사다.
반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초원에서 호연지기를 다져 내면의 급이 다른 남순이 엄마 금주의 돈 쓰기 방식과 어떻게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영웅다움을 성취해 나갈지도 기대된다. 여튼 근래 보기 드문 '힘 쎈 여자'들의 영웅담이 펼쳐지고 있어 한껏 '텐션'이 오르는 중이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거부한 채 고군분투하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힘 쎈 여자'들이 벌이는 부정의한 세상과의 싸움과 승리가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간만에 맛보는 혈기 왕성이다. 여성 모두도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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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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