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사람들에게 순례길을 걷게 하는가
[임경욱 기자]
▲ 산티아고, 나에게로 가는 길 책표지 800킬로미터를 걸으며 깨달은 현각스님의 고백록이다. |
ⓒ 미다스북스 |
무엇이 사람들에게 순례길을 걷게 하는가. 순교자 야고보처럼, 수행자 석가모니처럼 해마다 전 세계에서 30만 명이 넘는 방문자들을 산티아고 순례길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십자가를 하나씩 짊어지고 순례길을 찾는다. 자기 삶의 무게만큼의 봇짐을 하나씩 챙겨 메고 살아온 날들을 숙연하게 되짚어 보며, 살아갈 날들을 아름답게 수놓을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현각스님은 스님이 거기는 왜 가느냐는 물음에.
'예쁜 길이 좋아서…'라고 답했다지만, 그의 진정한 속내는 '머릿속 안개를 걷어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올 봄 카미노 프란세스 루트를 따라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한 달간의 도보순례 기간 내내 그를 지배한 화두는 30년간 불교 수행자로 살아오면서도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는 책의 프롤로그에 800㎞의 까미노를 걷는 자신의 보폭을 씨줄로 하고, 자신이 살아온 60년 인생길을 날줄로 하여 직조한 길과 인생에 관한 책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가 30여 년간 불교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인간들의 추악한 실상들로 겪어야 했던 깊은 절망과 환멸은 순례길 내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삶이 인간과 종교에 대한 절망과 환멸로만 채워져 있음을 깨닫고 배낭 하나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길을 걸으며,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직선의 유채밭 길을 걸으며, 가끔 뒤를 돌아보니 비로소 초라하기 그지없는 지난 삶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란다.
'딱 한 번뿐인 인생을 자책이나 원망으로 물들여서도 안 되며, 자기연민에 빠져서도 안 된다. 자기 연민은 인생의 병살타일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 때 운명은 조용히 길을 내어 준다. 무너지지만 않으면 그것이 운명을 극복하는 길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다양은 풍경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좋은 사람, 천사들뿐이다. 순례길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천사가 되는 모양이다. 일상의 짐을 벗어 던지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고독하게 삭히며 걸으니 모두 천사 아닌 성자가 되어 가는 게 당연한 일이겠다.
순례길에 스님께서 만난 어떤 천사의 말은 스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따뜻한 여운을 전한다. '내가 어떤 까미노 천사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천사가 돼요. 이런 까미노 매직을 경험하게 되면 언제나 다시 찾고 싶어지죠.' 그런 이유로 이 순례자는 벌써 세 번째 까미노를 찾았단다.
'실존적 삶의 3대 조건은 메멘토 모리, 까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가 아닐까. 인간은 죽음을 기억(메멘토 모리)할 때 비로소 순간순간에 충실(까르페 디엠)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야 자신의 운명을 사랑(아모르 파티)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과 개별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현재에 충실한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못한다. 환경을 탓하고 운명을 한탄한다.'
우리는 여행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순례길을 걷게 하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 노자가 말하는 허(虛)는 왜 우리가 악착같아서는 안 되는지, 왜 우리가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는 안 되는지를 잘 말해 준다.
▲ 이베리아반도의 피스테라 순례를 마치고 세상의 끝, 피스테라에 앉아 사념에 젖은 작가 |
ⓒ 미다스북스 |
그는 한 달간의 고단한 순례를 마치고 검푸른 대서양이 꿈틀대는 이베리아반도의 피스테라, 세상의 끝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다. 기나긴 순례를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늘과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세상은 언제나처럼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다.
스님도 산티아고 순례길 한 번 걸었다고 갑자기 성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5비 잉간(비겁, 비굴, 비열, 비정, 비루한 인간)들과 두억시니떼와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혐오와 경멸도 그의 마음그릇과 수행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만, 순례길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를 괴롭히던 머릿속의 안개는 깨끗이 걷힌 듯하다. '나는 나의 상처를 사랑하며, 운명의 광풍이 아니었으면 살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지금의 내 삶을 사랑한다. 나는 새롭게 펼쳐진 내 삶을 충분히 사랑하고 즐기는 것으로 운명을 내 앞에 무릎 꿇릴 것이다.'라며 세상의 끝에 앉아 미소 짓는 스님의 모습이 바로 성자(聖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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