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크닉] 붉은색 인장만 따라 가면 된다…서울을 여행하는 새로운 방법

유지연 2023. 10. 2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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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삼삼오오 여행용 가방을 끌며 걷고 있는 외국인들을 만날 때가 많아요. 스마트폰 지도를 켜고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그들을 보며, 새삼 서울의 매력을 되짚어 봅니다. 여러분들은 서울 여행을 한다면 어느 동네에 가고 싶은가요? 팝업의 성지라는 성수동,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가 즐비한 연남·연희동. 고즈넉한 어른의 산책길이 이어지는 서촌 등.

걷기 좋은 도시가 좋은 도시라고 하는데, 요즘 서울은 꽤 괜찮은 도시가 된 것 같습니다. 골목골목 만날 수 있는 도시 콘텐트가 풍성해졌다는 점에서요. 예전에는 강남역이나 광화문, 명동 같은 중심가 위주로 관광·상업·문화 자원이 몰렸다면, 최근 들어 점차 다양한 지역으로 문화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어요. 기존 도심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거닐만한 거리가 많이 생겨나고 있죠.

경복궁의 서쪽, 서촌에 늘어선 도시형 한옥들이 독특한 정취를 풍긴다. 사진 서울미래유산

생동하는 현재형 유산들


오늘 비크닉은 이런 도시 산책자들을 위한 한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붉은색 금속판에 새긴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인장을 본 적이 있나요? 문화재는 아니지만, 들여다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서울시에서 지정·관리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면면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박제된 문화재와 달리 지금도 생동하는 현재형 유산들이라고 할까요. 수십 년간 한자리를 지켜와 지금도 줄을 서는 맛집부터, 남다른 사연의 건물, 북적이는 전통 시장, 독특한 개성을 품은 골목까지. 모두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반영하는 유산들이죠.

서울미래유산을 나타내는 붉은색 인장. 사진 서울미래유산


오늘은 우리가 즐길만한 도시 콘텐트라는 측면에서 서울미래유산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비크닉이 지난달 ‘동행매력 서울투어’에 다녀왔습니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입니다. 발길 닫는 곳마다 재미난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경복궁의 서쪽, 서촌을 둘러봤습니다.

비크닉은 지난달 문화해설사와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동행 매력 서울 투어'와 함께했습니다. 사진 서울미래유산


경복궁 서쪽, 골목마다 스며든 이야기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 오른쪽으로 작게 난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담한 규모의 기와집이 보입니다. 간판은 ‘김봉수 작명소.’ 1958년 개업한 이래, 서울의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드나들면서 유명해진 작명소라고 합니다. 아이의 생을 축복하며, 귀하고 좋은 이름을 받는 우리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장소라는 점에서 지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습니다. 내부에 들어서면 병원 대기실처럼 긴 의자가 놓여있는데, 1970년대 손님이 많아 순번을 기다렸던 흔적이죠. 지금도 전화가 없어 예약 대신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하네요.
65년의 세월을 간직한 서촌의 명물, 김봉수 작명소. 사진 서울미래유산

경복궁의 서쪽에 형성돼 ‘서촌’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역관이나 의관처럼 전문직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촌 한옥마을’이 이런 역사를 보여주는 지역이죠. 다만 북촌과 달리 서촌에 현재 남아있는 한옥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 추진된 주택계획에 의해 지어진 도시형 한옥입니다. 협소한 대지 위에 ‘ㄱ’자 혹은 ‘ㄷ’자의 평면 형태로 작은 마당을 감싸고, 중앙에 대청을 두어 침실을 분리하는 형태죠. 이런 작은 한옥들이 밀집한 서촌 한옥 마을의 독특한 풍경은 그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지난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습니다.


예술가의 흔적이 담긴 공간으로 타임슬립


서촌에는 오래된 과거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도 세련된 카페와 식당, 갤러리들이 자리하면서 특유의 고즈넉함과 운치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죠. 서촌마을 초입에 위치한 헌책방 ‘대오서점’이 대표적입니다. 6.25 전쟁 직후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이라고 합니다.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 배경으로 등장, 복고 감성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죠.

서촌만의 예술적인 분위기는 과거 이곳을 거쳐 간 예술가들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화가 이중섭, 작가 이상을 비롯해 지금도 통인시장 안에는 시인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이 남아있어요. 윤동주 시인은 “내가 이 집에 살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인근 통인시장은 이곳의 명물인 ‘기름 떡볶이’와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하죠. 현금을 엽전으로 바꿔주는데 도시락통을 들고 각 가게에 가 엽전으로 음식을 구매할 수 있어요. 시장 내 가게들을 돌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도시락에 담을 수 있는 ‘시장통 뷔페’인 셈이죠.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즐기는 전통시장의 매력이 충만한 통인시장은 2015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어요.

시장통 뷔페인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한 서촌의 통인시장 전경. 사진 서울미래유산


400곳의 추억, 100개의 기억


무심코 지나쳤던 거리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었는지 새삼 알게 됐습니다. 고루한 문화재 탐방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우리 옆에 존재했던 일상의 장소를 다시 보는 작업이었기에 더 의미 있었죠.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미래유산은 ‘지정문화재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닌 유·무형의 것 가운데 서울 시민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기억과 감성을 지닌 근·현대 서울의 유산’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선정을 시작해, 올해로 500개를 넘어섰습니다. 400여 군데의 장소와 100여 개의 무형 유산이 지정됐죠.

지난 10년간 서울 미래유산은 발굴에 초점을 맞춰 진행해왔지만, 앞으로는 이를 잘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난 2018년부터 경영난을 겪는 민간 소유 미래유산에 소규모 수리 및 환경개선 비용을 직접 지원하는 이유죠. 미래 유산에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팸플릿이나 엽서 등을 제작해 홍보에 나서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가 아닌 사유재산이므로 소유자의 자발적 보존 노력도 필요합니다.


루이비통이 반한 잠수교도 서울미래유산


서울미래유산인 잠수교는 2026년 한강 최초의 보행교로 바뀔 예정이다. 사진 서울미래유산
미래유산은 단지 과거에 머문 유산만이 아니라 현재, 나아가 미래의 가치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반포와 용산을 잇는 반포대교 하단 잠수교는 서울의 명물이죠. 장마 시 한강 수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의 역할을 수행해, 교량으로서 보존가치가 있어 지난 2013년 미래유산으로 선정됐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잠수교는 서울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에 따라 2026년 한강 최초의 보행교로 바뀔 예정입니다. 현재 차량 통행이 이뤄지는 부분이 전면 도보로 개방되는 거죠. 산책로와 소규모 공연장 등의 기능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실제로 이미 잠수교에서는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이뤄지고 있고, 지난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열린 루이비통 프리폴 패션쇼가 열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과거의 유산이 진정한 ‘미래’ 유산으로 거듭난 대표적 사례죠.


도시 곳곳에 숨은 붉은색 인장을 찾아서


오늘날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은 대중교통 시스템이나 고층빌딩만은 아닙니다. 골목골목 스며든 다채롭고 풍성한 도시 콘텐트야말로 그 도시의 가치이자 경쟁력이죠. 서울 미래유산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도시 콘텐트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 만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즐기고 향유할 때 더 잘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거쳐 더 증폭된 기억과 감성으로 미래까지 전달되었을 때 더 의미 있기 때문이죠.

걷기 좋은 계절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의 동네를 탐방해보는 건 어떨까요. 붉은색 인장 ‘서울미래유산’의 가이드를 따라서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길거리와 골목길, 오래된 가게와 빌딩에서 몰랐던 이야기들 혹은 위대한 유산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 구석구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도시 콘텐트다. 사진 서울미래유산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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