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시청률 속 이뤄진 산타와 닥터의 만남
[김성호 기자]
매회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해야 하는 드라마, 것도 진전되는 서사보다는 매회의 독자적인 소재와 설정을 찾아야 하는 시트콤 형식의 SF드라마는 아이디어의 고갈문제에 봉착할 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하여 메인 작가 외 여러 명의 보조 작가를 두기도 하지만, 반복되는 회차 속에서 작가들의 역량 또한 갈려나갈 밖에 없는 일이다.
보통의 드라마도 그러할 텐데, 영국을 대표하는 BBC의 간판 <닥터 후>라면 그 부담이 어떠할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매 시즌을 마무리한 뒤 다시 몇 편의 독자적인 에피소드를 내놓는 일을 멈추지 않으니, 그런 회차를 불러 스페셜이라 한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방영하는 크리스마스 스페셜 편은 아무리 시청률이 적게 나와도 30% 이상을 찍는 인기를 구가해 관심을 모은다.
2010년대 들어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며 방영 때마다 동시시청자가 1000만 명을 훌쩍 넘겼던 <닥터 후>다. 한국에서도 어마어마한 관심을 받으며 주연들의 팬미팅 행사를 했을 만큼 전 세계에 '후비안'이라 불리는 확고한 팬층을 양산한 시리즈다. 이 드라마가 오늘날엔 다시 영국의 그렇고 그런 드라마쯤으로 돌아가는 모습인데, 그 몰락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두고 많은 이들이 왈가왈부하곤 한다.
▲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 포스터 |
ⓒ BBC |
무너지는 시청률 속 <닥터 후>의 승부수
<닥터 후> 뉴 시즌 8이 종영된 뒤 뉴 시즌 9이 나오기 전 한 편의 스페셜 회차가 나왔다.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라 이름 붙은 이 편은 평균 시청률이 20%대로 떨어진 상황에서 근 1년 만에 30% 시청률을 되찾을 만큼 주목받았다. 그건 <닥터 후>가 대대로 스페셜 회차 제작에 공을 들여왔고, 특별히 공 들인 회차의 에피소드는 시리즈의 옛 명성을 충분히 찾아줄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라 해도 좋겠다.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모팻은 이 시리즈에서 야심찬 설정을 꺼내든다. 배경은 크리스마스 새벽, 영국 런던 컴패니언인 클라라(제나 콜먼 분)의 집이다. 한밤 중 큰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마당으로 나온 클라라는 집 앞에 추락한 산타와 엘프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산타가 실존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클라라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함께 대화를 나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닥터(피터 카팔디 분)가 타디스를 몰고 마당에 나타난다. 닥터는 다짜고짜 클라라를 태우고 어딘가로 날아간다.
▲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 스틸컷 |
ⓒ BBC |
꿈 속의 꿈으로부터 불러들인 상상력
이들은 꿈게가 사람을 잡아먹는 기생생물이란 것을 알아챈다. 꿈게가 사람을 덮쳐 꿈을 꾸게 하고는 뇌를 빨아먹는데, 숙주가 된 인간은 행복한 꿈을 꾸게 되어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닥터는 대원들과 함께 사태를 해결하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 모두가 실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꿈 속의 꿈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다층구조의 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2010년 작 <인셉션>이 전면적으로 사용한 소재로, 놀란을 배출한 나라인 영국의 대표 드라마가 이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이미 오마주적 설정이라 해도 좋겠다.
▲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 스틸컷 |
ⓒ BBC |
런던 밤하늘을 함께 달리는 산타와 닥터
소재 고갈에 시달리던 작가가 마지막 기댄 것은 역시 꿈이다. 시리즈 겨울 스페셜의 오랜 전통인 크리스마스와 산타 클로스를 SF적 설정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게 하는 데도 꿈은 최적의 선택이 되어 준다. 그러면서도 자국이 낳은 스타 감독 놀란의 <인셉션>을 우아하게 오마쥬하는 솜씨가 기품을 느끼게 한다. 매 회차 소재고갈에 허덕이는 가운데서 스페셜 만큼은 형편없이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편이라 해도 좋겠다.
특히 산타 클로스의 썰매를 타고 런던의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의 상쾌함, 그리고도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반전에 반전을 기하는 집요함이 시리즈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작가 모팻의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라마는 적어도 꿈속의 꿈 개수로는 <인셉션>을 넘어서는데, 반전의 반복에도 난잡해지지만은 않는 집중력 또한 인정할 만하다.
▲ <닥터 후: 마지막 크리스마스> 스틸컷 |
ⓒ B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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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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