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수의 대부' 권오헌, 말기 폐암환자로 투병 중입니다 [민병래의 사수만보]
[글쓴이: 민병래(작가)]
▲ 권오헌 선생은 지금 폐암 4기에 인후암까지 겹쳐 고초를 겪고 있다. 자택에서 부쩍 수척해진 모습을 찍었다. |
ⓒ 민병래 |
"이대로 놔두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
권오헌은 담당 의사의 판단에 마음이 흔들렸다. 불과 일주일 전에 유언까지 한 마당에 수술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눈을 감기 전까지 화장실 출입을 내 발로 하고 삼시 세끼 내 손으로 차려 먹어야 하니 어쩔 수 있겠는가?
권오헌은 조카 맹영선, 양심수후원회의 김호현·김혜순 등 여러 동지와 상의하고 허리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응급실로 가라는 안내를 받고 응급병상에 하룻밤을 머물렀다가 1월 10일 오후 3시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로 가는 침대에서 잘 이겨내시라며 손을 잡아주던 동지들의 온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권오헌은 눈을 감았다. 침대를 옮기는 간호사의 발소리, 병실 복도에 가득한 알코올 냄새, 수술실까지는 제법 먼 길이었다.
남민전 사건으로 3년 4개월을 복역하고
올해 87살의 권오헌은 박정희 독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3년 4개월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에 만기 출소한 그는 남민전 동지의 석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숨진 이재문과 사형이 집행된 신향식은 어쩔 수 없지만 무기징역을 받은 안재구 외에도 징역 15년을 받은 김남주 시인처럼 많은 동지가 옥중에 남아 있던 터였다.
1988년에 남민전 동지들이 형 집행 정지로 모두 석방된 후에 권오헌은 양심수후원회 회장과 민가협 공동의장을 맡아 지금까지 모든 구속자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세상은 이런 그를 '평생 청년'이고 '양심수의 대부'라 부른다.
하지만 길 위에서 평생을 보낸 권오헌에게 운명은 심술을 부렸다. 2017년 6월 오뉴월에도 기침과 콧물이 멎지 않아 혜화동의 서울대병원에서 CT를 찍어보니 왼쪽 폐에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그날 바로 조직 검사를 했다. 결과는 몸 일곱 곳으로 암세포가 퍼져나간 폐암 4기였다. 담당 의사는 수술이나 방사선치료는 어렵다며 약물치료를 권했다.
신기할 정도로 약이 잘 들어 암덩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약을 타는 주기도 보름에서 한 달로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두 달 간격이 되었다. 권오헌은 다음 진료 때 보자는 얘기를 들으면 "아, 내가 두 달은 더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신이 났다.
▲ 권오헌이 자필로 쓴 일기. 그는 척추 수술을 받은 그다음 날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일기를 썼다. |
ⓒ 권오헌제공 |
그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12월 30일과 31일 이틀 동안은 정신도 어지럽고 아픔도 심했다. 그는 "오늘 혹은 내일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조바심이 났다. 202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이지만 1989년 창립 때부터 함께한 양심수후원회의 임원과 회원들을 불렀다. 유언을 남기고자 함이었다.
권오헌의 급한 연락에 모두 달려왔다. 다큐멘터리감독 김동원은 권오헌의 마지막 모습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담으려고 영상 장비를 챙겨왔다. 그의 수유동 작은 빌라는 발 디딜 틈이 없이 꽉 찼다. 권오헌이 문익환 목사의 집이 있는 수유리로 이사 온 것은 1993년, 문 목사와 이웃해 살며 새벽마다 같이 북한산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수유리에서 권오헌은 행복했다. 집 바로 뒤에 북한산으로 향하는 자드락길이 있어 곧바로 올라가면 시단봉, 노적봉을 거쳐 백운대에 다다른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구천 계곡을 거쳐 보현봉, 형제봉을 에돌아 정릉으로 내려갈 수 있다. 힘이 넘치는 날에는 문수봉까지 올라 승가봉을 거쳐 족두리봉까지 북한산의 등뼈를 걸었다. 권오헌은 이웃한 도봉산도 즐겨 탔다. 포대능선에서 자운봉으로 가는 길은 거칠고 아찔해서 좋았다. 그는 산을 타면서 농성, 행진, 집회 등 길 위에서 겪은 수고를 달랬다.
그에게 열 평도 채 안 되는 수유리집은 작아도 넉넉했다. 양심수 석방 운동에 헌신하느라 결혼할 새가 없었던 권오헌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둥지였다. 언제든 일어설 수 있게 몸과 마음을 북돋아 주는 그루터기였다.
▲ 권오헌의 모습. 그는 수유동 자택에서 말기암 투병중이다. |
ⓒ 민병래 |
회복실에서 소리쳤으나 모깃소리였다
권오헌은 등에서 찌르고 쪼는 아픔에 눈을 번쩍 떴다. 등을 마구 두드리면 고통이 덜할까? 그는 "누구 없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바깥으로 뱉어지지 않는다. 침대 난간을 꽉 붙잡고 "여기요, 여기요" 소리쳤지만 모깃소리였다. 찔끔 나오는 눈물을 닦는데 눈곱이 한 움큼 묻어난다.
여기가 어딘가 권오헌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좌우로 여러 병상이 늘어서 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맞은편 노인 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창밖에는 싸리 눈이 흩날리고 간간이 마른 낙엽이 몸을 부딪치다 사라지곤 했다.
그가 어금니를 악물며 고통을 참고 있는데 "깨어나셨어요, 권오헌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간호사다. 그는 수술이 4시간이 넘게 걸렸고 담당 교수는 잘 됐다고 했다며 다음 회진 때 자세히 들으라고 했다. 간호사는 또 이건 식염수 줄, 이건 소변 줄, 이건 수술 부위에서 피를 뽑아내는 줄이라고 여러 고무호스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야 권오헌은 자신이 회복실에 있음을 알아챘다. 권오헌은 돌아서는 간호사에게 통증을 호소했다. 간호사는 마취가 일찍 풀린 모양이라며 서둘러 진통제를 놓았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아픔은 가시지 않았다.
권오헌은 통증과 싸우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호흡을 자주 해야 폐렴이 예방된다며 간호사가 당부했으나 숨을 마시고 내뱉는 게 쉽지 않다. 가슴이 뻐근하고 왼쪽 갈비뼈 아래가 무지근하면서 심하게 눌리기 때문이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눈을 감았다. 암덩이가 뇌로 파고든 이후에는 눈을 감으면 가슴 아픈 기억,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물결처럼 왔다 사라지곤 한다. 때로는 하나의 덩어리로 다가와서 기묘한 글씨가 되고 문장이 되곤 했다.
그 몽롱함 속에서도 언제나 뚜렷한 건 이인모 노인의 모습이다. 조선인민군의 종군기자로 내려왔다 34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이인모의 사연이 1989년 <말> 지를 통해 알려지면서 남북 양측에서는 이인모의 송환 요구가 빗발쳤다. 1992년에 열린 민가협 4차 총회에서는 '송환'을 특별 사업으로 채택하고,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다.
▲ 권오헌이 이석기 의원에게 보낸 편지. 그는 새해 아침이면 모든 양심수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
ⓒ 권오헌제공 |
이때 민가협 공동의장으로 송환 추진위 대표였던 권오헌이 통일부와 안기부의 책임자를 상대로 밤새 협상을 벌였다. 덕분에 "선물꾸러미는 모두 풀어서 문제 될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북으로 보낸다"라고 합의를 보았다. 다음 날인 1993년 3월 19일 이인모는 북으로 올라갔다. 이 송환은 남북 관계에서 이정표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김대중과 김정일이 6·15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2000년 9월 2일 장기수 63명이 송환되게 되었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반북 대결 정책 분위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에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이루어진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언제나 권오헌이 있었다. 권오헌은 이인모 노인과 장기수의 송환에 자신이 이바지했음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로 꼽곤 했다.
"환자분 이제 병실로 옮겨갑니다"라는 소리에 권오헌은 눈을 떴다. 이인모 노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는데 꿈이었나? 잠이 들었었나? 권오헌은 혼자 되뇌며 눈을 비볐다. 수술하기 전 배정받았던 44병동 7호실에 와보니 양심수후원회의 이종문 부회장이 휴지와 물티슈, 사과 등을 잔뜩 싸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
수술하던 날도 많은 분이 전화를 주었다. 민가협 조순덕 회장,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이사장, 장경욱 변호사, 4월혁명회의 한찬욱 사무처장, 김지영내과의 김지영 원장, 통일뉴스의 김치관 국장, 장기수였던 양희철·박순자 선생, 3층의 아주머니, 이정태·김래곤 위원 등 다 헤아릴 수 없다. 권오헌은 자신 때문에 시간을 내고 마음 써줌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 민가협 주최로 열린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집회. 마이크를 쥔 사람이 권오헌이다. |
ⓒ 양심수후원회 제공 |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해 민가협에서 1993년에 시작한 목요집회는 1991년에 발걸음을 뗀 수요시위와 함께 한국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열린 이 집회에 권오헌은 거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 양심수후원회 회장으로서 민가협 공동의장으로서 여는 말을 도맡다시피하며 목요집회를 이끌었다. 그는 이 여는 말 원고를 언제나 손으로 썼다. 컴퓨터 자판에 익숙하지 않은 권오헌은 평생 써온 일기며 성명서·언론 기고문도 모두 만년필로 썼다. 일주일마다 목요집회가 돌아오지만 한 번도 똑같은 원고를 사용한 적이 없다. 날카롭게 정세를 진단했다. 2016년 2월 10일 박근혜가 개성공단을 폐쇄할 때 이를 꾸짖었고 임기 말이 되도록 장기수 2차 송환에 무관심한 문재인 정부를 나무랐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권오헌의 목소리는 힘차고 구성졌다. 그가 있어 목요집회는 든든했고 풍성했다. 그렇다고 권오헌의 발걸음이 목요집회, 양심수 석방 운동만을 향했던 것은 아니다. 이인모 노인과 장기수의 송환 운동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민주시민운동 진영은 권오헌의 어깨에 많은 짐을 지웠다. 그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순·미선 대책위, 용산철거민살인진압공대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반대운동본부, 세월호참사 국민대책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등의 대표를 맡아 거리에서 열린 모든 싸움에 빠지지 않았다. 어떤 장소든 마다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길 위에서 마신 최루탄, 매연, 흙먼지 이 모든 게 그의 폐를 병들게 하였으리라.
하루에도 몇 개씩 되는 일정을 치르고도 그는 집에 가서 편히 쉬지 못했다. 겨울밤 인수 초등학교 옆 언덕길을 올라가 차가운 방문을 열 때도 외로워할 틈이 없었다. 집에 들어서면 할 일이 산더미였다.
충남 홍성에서 초등학교만 나온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동북고등학교 통신교육과정을 밟았고, 군대에서 의무대에 배속돼 영어로 된 약 이름을 취급하게 되자 '영어의 길'을 사서 독학했다. 남민전 시절에는 조직원 교양을 위해 일본어로 된 경제학 서적을 번역했다. 그에게 초등학교 졸업이란 학력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더 노력하게 된 채찍이었다. 그가 평생 일기를 거르지 않고 쓴 까닭도 자신을 벼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언제나 새벽 2시까지 일기를 적고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했다. 또 다음 날 할 일을 점검하고 새벽이면 일어나 북한산 둘레길을 돌았다. 집안 내력으로 평생 위염을 달고 살아 언제나 소식하던 그는 이렇게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 몸무게가 46kg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권오헌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양심수를 위해 살았다. 그들을 돌보는 일은 세상이 더더욱 알아주지 않음에도 묵묵하고 꿋꿋하게! 허리 수술까지 받아 소변줄을 차고 머리까지 암덩이가 번져 정신이 흐릿해진 이날까지 목요집회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권오헌은 못내 안타깝다. 목요집회가 계속되었다면 윤석열 정부의 철 지난 반공 정책과 무모한 대결 정책을 조금이라도 저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목요집회가 부활했다면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 제7조가 합헌이라고 그리 쉽게 결정하지는 못했을 텐데…
▲ 2023년 1월 6일 낮 12시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열린 양심수후원회 신년 하례식. 맨 뒤 앉은 줄 왼쪽에서 두번 째가 권오헌 선생이다. |
ⓒ 양심수 후원회 제공 |
권오헌 선생은 1월 20일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했다. 곧바로 성북서울요양병원에 입원해 걷기 연습 등 척추 수술 후의 재활치료를 받고 수유동 집으로 돌아와 계속 투병 중이다. 지난 9월에는 폐암에서 전이된 것이 아닌 별도의 인후암이 발견되어 10월 19일부터 매일 5분씩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한편 양심수후원회에서는 권오헌 선생의 문집 <귄오헌의 가려졌던 통일여정>을 발간해 오는 11월 18일 서울 종로의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권오헌 명예회장 문집 출판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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