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그가 보낸 택배 속엔 마약 있었다…'300만원' 혹독한 대가

윤지원 2023. 10.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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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 넷플릭스

지난해 가을, 20대 인디음악가 A씨는 돈이 급했다. 음악 기기와 앨범 제작비가 필요해 최근 대부업체에서 6000만원을 빌렸는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불현듯 몇 달 전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나르코스 파블로’란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의 ‘구인 공지’가 떠올랐다. 콜롬비아 마약왕의 일대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제목을 딴 이 대화방에선, 실제 마약류 거래가 왕성했고 ‘마약류 배달책으로 일하면 대기업 임원만큼 돈 벌 수 있다’는 공지글이 있었다. A씨는 대화방 운영자이자 마약 판매상인 ‘파블로’에게 ‘구직 의사’를 밝혔다.

A씨는 파블로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파블로는 A씨를 정확히 알길 원했다. 운전면허증, 사진, 주소, 전화번호 등을 보냈고 ‘비대면 신원 인증’도 했다. 그가 나오라는 서울 신림역으로 가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지켜볼 그의 시선을 짐작만 했다. 까다로운 심사 끝에 A씨는 파블로의 점조직에 합류했다.

마약판매조직의 마약운반책(드라퍼)가 도심 주택가 창틀에 은닉한 마약. 사진 경남경찰청


파블로는 ‘공식 업무’ 외 ‘별도 지령’도 내렸다. 해외서 온 ‘내용물 미상’ 택배를 대신 받는 일. 인천공항으로 들어온 물품을 베트남인이 운영하는 인천의 한 영세 택배업체가 A씨 집으로 보내주면, 이를 받아 내용물만 꺼내 종량제 봉투에 담아 집 밖 어딘가에 숨겨두고 자신에게 장소를 보고하라 했다. 실제로 A씨가 택배를 받아보니 상자 속엔 봉지라면이 한가득 있었다. 그 안엔 합성대마가 숨겨져 있었지만 A씨는 뜯어보지 않고 지령을 완수했다.

문제는 파블로가 A씨와 상의 없이 A씨에게 또 다른 택배 상자를 보내면서 발생했다. 때마침 인천세관이 이 택배에서 합성 대마를 발견해 ‘통제배달’을 했다. 마약 범죄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마약을 숨긴 화물을 통상적인 절차로 위장해 배달하는 수사기법이다. 얼떨결에 택배를 받은 A씨는 현장에서 긴급체포됐다.

4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당정협의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연합뉴스


첫 업무를 시작한 날(지난해 9월 19일)부터 체포된 날(11월 8일)까지 A씨가 파블로로부터 받은 돈은 300만원, 그마저도 수수료를 떼면 270만원이었다. 이보다 길고 혹독한 대가가 이어졌다. A씨는 지난 5월 구속 상태서 재판에 넘겨졌다. ▶봉지라면 속 대마초가 있던 걸 알았는지 ▶파블로와의 밀수 공모를 인정할 수 있는지를 두고 석 달 간 법정 다툼이 이어졌다.

법원은 이런 항변을 일부 들어주긴 했지만, A씨는 실형을 피할 수 없었다. 인천지방법원 형사합의15부(재판장 류호중)는 지난 12일 마약 소지 혐의만 인정해 A씨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택배를 적극 수령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택배의 발송·수입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며 “A씨 첫 달 급여 300만원은 마약 드랍의 대가로 보기엔 적지 않지만, 두 번의 밀수 대가로 보기엔 다소 적다”고 봤다. 다만 재판부는 “파블로가 지시하는 일이 마약 관련이란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봤다. 다만 이 판결은 확정되지 않았다. 라면 봉지를 뜯어보지 않아 마약이 든 줄 몰랐다고 주장해 온 A씨와, 징역 12년을 구형했던 검찰 모두 항소해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이 진행된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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