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대형누각이 국보에 가까워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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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27일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한 달간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결정한다.
문화재청은 전문가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 충분한 가치를 확인했다.
문화재청 측은 "죽서루와 마찬가지로 건축적 가치는 물론 경관적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저명한 인사들이 방문해 남긴 시문 등으로 학술 가치도 높아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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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서 먼저 국보 요청 "충분한 가치 확인"
문화재청은 27일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한 달간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결정한다. 주목받은 배경은 조금 특별하다. 지난해 지자체로부터 먼저 요청받았다. 문화재청은 전문가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통해 충분한 가치를 확인했다.
삼척 죽서루는 12세기에 창건됐다고 추정된다. 고려 명종(1171∼1197) 때 활동한 김극기(1148~1209)의 시가 근거다. 죽서루 풍경이 묘사돼 있다. 안축(1282~1348)과 정추(1333~1382)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서루(西樓)’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부터 '죽서루(竹西樓)'로 불렸다.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서쪽에 있는 누각이라는 뜻에서 명명됐다고 전해진다.
관련 역사는 김수온(1410∼1481)의 '죽서루단청기(1472)와 허목(1595∼1682)의 '죽서루기(1662)'에서도 파악된다. 부사 김효손(1373∼1429)이 1403년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글이 적혀 있다. 고려 시대에 창건되고 조선 전기에 재건된 뒤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현재는 조선 후기 증축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형태는 맞배지붕 옆에 삼각형의 합각을 남기고 경사를 지어 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이다. 1403년 정면 다섯 칸(측면 두 칸) 규모로 중창됐는데 1503년에 남쪽 한 칸(측면 세 칸), 1788년에 북쪽 한 칸(측면 두 칸)이 각각 증축됐다. 문화재청 측은 "조선 초기 중앙 다섯 칸과 조선 중기 뒤 확장된 좌·우측 한 칸이 기둥 배열, 가구 짜임, 천장·바닥 면 처리, 공포·세부 의장 등에서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죽서루는 특유 절경으로 수많은 시문, 가사, 그림의 소재가 됐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이 대표적인 예다. 김홍도(1745~?), 강세황(1713~1791) 등도 주변 하천(오십천)과 어우러진 경관을 눈여겨봤다.
밀양 영남루는 애초 대형누각이 아니었다. 통일신라 때 건립된 영남사에 작은 규모로 조성됐다. 당시 금벽루(金璧樓), 소루(小樓), 죽루(竹樓) 등으로 불렸다. 고려 시대에 영남사는 폐사됐다. 홀로 남겨진 누각은 공민왕 14년(1365) 밀양 군수 김주(1339~1404)에 의해 중창되고 '영남루(嶺南樓)'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 초에는 밀양 부사 안질(?~1447)에 의해 중창되면서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가 마련됐다. 이 이름은 1442년 경상도사 권기(?~?)에 의해 소루로 바뀌었고, 부사 이충걸(1465~1527)에 의해 임경당(현 침류각)으로 개명됐다. 연산군 때 밀양 부사 김영추는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빈객 숙소인 망호당(현 능파각)을 지었다. 그러나 모든 부속 시설들은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소실됐다. 밀양 부사 이인재는 1844년 재건에 앞장섰다. 대루를 확장하고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다. 대부분 관원과 지방 빈객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했다.
영남루는 경사지에 맞게 건물을 적절히 배치해 조형미가 뛰어나다.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우러져 독보적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겼을 정도다.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약 300개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열두 개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측은 "죽서루와 마찬가지로 건축적 가치는 물론 경관적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저명한 인사들이 방문해 남긴 시문 등으로 학술 가치도 높아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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