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지금 우리는 문명사회에 살고 있나?
2014년 영화 ‘레일웨이 맨(The Railway Man)'. 2차세계대전 중 싱가포르함락 당시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 에릭 로맥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믿고 보는 배우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았다.
전쟁이 끝나 로맥스는 고향에서 겉보기에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듯하다. 하지만 포로 시절 일본군으로 받은 학대가 트라우마로 작용해 그를 괴롭힌다.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되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자신이 학대받은 장소를 찾아간다.
그곳은 전쟁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을 고문한 일본 헌병은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변신해 있는 것이 아닌가. 로맥스는 관람객들이 다 나간 뒤에 그 일본인을 붙잡고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인 가이드는 로맥스를 기억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며 싱가포르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다. 이번에는 일본군 헌병들이 포로가 된다. 그때 연합군 장교가 파르르 떠는 일본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공정하게 대해줄 생각이다. 문명인이니까. 하지만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
장면이 다시 현재로 바뀐다. 로맥스는 일본 가이드에게 자신이 당한 것처럼 복수하려다 간신히 참는다.
“(일본군은) 단지 항복했다고 우리를 짐승처럼 다뤘지.”
가이드가 로맥스에게 말한다.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전부 다요. 우리가 이길 거라고, 명예로울 것이라는 것, 다 거짓말이었어요. 당신만이 진실을 얘기했죠. 우리가 아무리 당신을 고문해도 당신은 삶이 제일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사전 정보 없이 주연 배우 두 사람만 보고 선택한 영화 ‘레일웨이 맨’. 뜻밖의 메시지에 나는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았다. ‘문명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한 사람만 꼽으라면, 아마도 윈스턴 처칠(1874~1965)이 뽑히지 않을까. 2차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사람이니까.
최근 나는 직업외교관 출신 지인 W씨로부터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관점에 대해 들었다. 그것은 2차세계대전을 문명과 야만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문명 세력이고,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은 야만 세력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소련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치 독일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동(東)과 서(西) 양쪽에서 독일을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어서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동부전선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대결장이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 대회전.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900일간 지속된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포위공격이 독-소 대결의 상징적인 전쟁이었다.
히틀러와 전쟁을 벌이며 힘에 부친 스탈린은 처칠에게 줄기차게 요구한다. 유럽대륙에 상륙해 빨리 서부전선을 만들어달라. 서부전선이 형성되면 독일은 그만큼 전력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고 소련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처칠은 스탈린의 제안에 동의하면서도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1944년 6월에서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전직 외교관 W씨는 이런 해설을 달았다. 나치 독일을 절멸시키려 일시적으로 소련과 손을 잡았지만 처칠의 머릿속에는 공산주의 소련은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야만 세력이었다. 처칠은 동부전선을 최대한 오래 끌어 양대 전체주의 세력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겠다고 구상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샤이러의 ‘제3공화국의 흥망’을 보면 히틀러와 나치 실세들의 최후가 상세하게 나온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베를린 함락이 임박해지자 비밀 지하벙커에서 유서를 쓴다. 이쯤 되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히틀러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고 주변에 용서를 구하는 유서를 남겼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천만의 말씀. 그건 보통 사람의 상식적 기대일 뿐이다. 지난여름 리움미술관에 전시되어 관람객의 관심을 끈 게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릎 꿇은 히틀러’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가의 희망 섞인 상상일 뿐이다.
그는 유서에까지 거짓말과 변명, 자기 미화를 늘어놓고 끝까지 권력욕을 놓지 못해 배신자를 파면하고 후계자를 지명한다. 유대인에 대한 저주와 박해를 유훈으로 남긴다.
나치 히틀러의 제2인자이자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인 1945년 5월1일 자녀 6명과 아내를 살해한 뒤에 자살한다. 그의 거짓 선동이 얼마나 치밀했으면 독일 국민 대다수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에도 독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 국민 대부분은 그가 설계한 미디어 프레임에 갇혀 진실에 눈이 멀었고 죽음의 행렬에 올라탔다.
나는 일찌감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푸틴이 죽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을 예측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그대로 들어맞는 중이다. 푸틴 체제는 스탈린 체제의 재현이다. 언론·종교·학계가 푸틴과 짬짜미로 거짓 논리를 생산·확산시켜 러시아 대중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침략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부른다. 특별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정권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러시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미국 앞잡이인 나치라고 가르친다. 오죽하면 소설가 김진명이 ‘푸틴을 죽이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했을까 싶다.
문화혁명은 정적 제거를 위한 대반란 드라마다. 빅브러더 모택동이 청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권력 강화에 이용한 사건이다. 홍위병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어록 수첩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홍위병들은 인형극의 인형처럼 빅브러더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대표적으로 류사오치(劉少奇)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시진핑(習近平) 역시 마오쩌둥 시대의 재현이다. 시진핑 체제에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를 내면 그 사람이 누구든 소리 없이 실종되는 사례들을 우리는 수시로 확인한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중에 ‘학습강국(學習强國)’이 있다. 시진핑의 사상과 발언을 익히도록 만든 모바일 앱이 ‘학습강국’이다. 올해 중국 대학 입시의 논술영역에서 시진핑의 어록이 출제되기도 했다. 시진핑이 마오 개인 숭배에 근접했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튼 말이 아니다.
문명사회란 무엇인가. 문명 세계에 사는 문명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비로소 문명인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고, 둘째는 과학적 사실을 신뢰하고, 셋째는 법치주의가 작동해야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가 동해를 오염시킨다는 주장은 반과학의 극치였다. 지구역사가 시작된 45억년 전부터 태평양 해류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자칭 목사라는 어떤 이는 태평양 해류가 홋카이도와 혼슈섬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 한 달 만에 동해에 이른다고 선동했고, 일부 국민이 이를 믿었다. 또한 진보를 참칭한 권력은 국가통계를 마음대로 조작해 국민을 속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 나치 독일, 일본 군국주의, 모택동 공산당이 자행했던 일들이 한국에서 버젓이 벌어졌다.
한국인은 지금 과연 문명 세계에 살고 있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해나 아렌트(1906~1975)의 통찰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나치 체제를 경험한 아렌트는 일찍이 히틀러가 사라진다고 전체주의가 종식되는 것은 아니라고 갈파했다. 그는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전체주의의 이상적인 지배 대상은 사실과 허구의 차이, 진실과 거짓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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